[문화마당] 아줌마들의 책읽기/신동호 시인
수정 2010-12-23 00:48
입력 2010-12-23 00:00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로 시작한 책읽기는 ‘닫힌 우물’의 은유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고향집 우물은 어머니의 싱싱한 자궁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막혔다는 건 곧 남성중심 사회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
그저 평범한 일상과 씨름하던 아줌마들은 영화 ‘카모메 식당’에 가서는 일탈에 대한 대리만족을 발견한 모양이었습니다. 의무감과 관계의 짐을 벗고픈 우리시대의 아줌마들. 그러나 아줌마들은 주인공 ‘사치에’의 반복되는 수련 장면을 통해 진리를 발견합니다. ‘지독한 일상을 견디며 지키는 사람에게 비로소 일탈은 의미 있다.’
설거지와 빨래, 이 지루한 반복을 견뎌내는 아줌마들의 힘이 변화의 원동력임을 옆에서 가만히 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아줌마들이 코치하더군요. “‘오늘 저녁 먹고 들어와?’라는 통화가 무슨 뜻인지 아세요?” “맛있는 거 해놓겠으니 빨리 오라는 뜻?” 그게 아니랍니다. 일찍 들어오지 말라는 뜻이랍니다. 일상을 지키면서 동시에 일상을 살짝 벗어나는 아줌마들의 대화법인 게지요.
며칠 전 여전히 책읽기를 이어가는 아줌마들의 독서 후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책의 겉모양뿐 아니라 책 속까지 좋아지기 시작했다.’네요. 셰퍼와 배로스의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 그리 만만한 책이 아님에도 ‘좀 시시하다.’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교과서적 지식을 벗어나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배경지식의 욕구를 표현한 아줌마도, 더더욱 놀라운 건 ‘세계에 대한 자기 인식과 해석을 목표로 삼았다.’는 그럴싸한 말을 한 아줌마도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오기에 어려운 몇 고비를 넘었습니다. 마이클 폴란의 ‘욕망하는 식물’이 처음의 난관이었습니다만, 자연세계만의 질서를 읽으며 막막한 시간의 연결선상에 놓인 자신을 발견한 건 놀라운 깨달음이었습니다. 코엘류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는 조금 쉬어가려는 책이었지만 아줌마들은 거기에서 ‘똑같아지지 않으려는 노력’ 즉, 남들과 같은 건 편리하겠지만 결국 ‘나’를 잃는 것이라는 무거운 진리에 다가섰습니다.
압권은 다 읽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이었습니다. 괴테가 너무 잘난 체한다는 농담으로 시작된 이야기. 그러나 자기가 느끼는 대로, 자신 있게 떠들기가 괴테의 잘난 척 비법이라는 인문학의 요체로 성큼 다가섰습니다.
이불 위에 배를 깔고 책읽기 좋은 계절입니다. 밤도 깊고요. 많이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위해 ‘책읽는 엄마’가 돼 보세요. 세상의 모든 책들이 자신을 제 마음대로 읽어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용기를 가지시고요. 소월의 시를, 읽는 사람의 숫자만큼 다르게 해석하는 시대. 그날 ‘가도 가도 왕십리’ 내리던 비도 그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2010-12-23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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