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2000년전 왕성유적을 저주하게 만드는 나라/이형구 동양고고학연구소장·전 선문대 대학원장
수정 2010-09-10 01:16
입력 2010-09-10 00:00
1990년대에는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이 재개발되면서 성 내부의 유적이 파괴되는 것을 막고자 관계기관에 건의서를 내고 주민들을 설득하기도 했다. 여기에 많은 사람의 노력이 더해졌고, 결국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후손들이 조상의 귀중한 유산을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 백제가 남쪽으로 이동하기 전에 자리 잡은 근거지였는지를 확실히 파악해 후회하지 않도록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풍납토성 내부의 재건축은 사실상 전면 중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 풍납토성은 학계의 노력이 뒷빋침되면서 한성백제의 왕성으로 확실하게 규명되었다. 그러나 풍납토성 내부에서 살아가는 5만명 남짓한 주민들은 이때 공포된 문화재보호법 시행령에 묶여 낡은 집을 재개발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이웃 동네에 비하여 부동산 가치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등 재산상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필자는 지금으로부터 꼭 5년 전 정부가 ‘8·15부동산대책’으로 송파신도시 건설계획을 발표했을 때 문화재 보존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풍납토성 주민의 이주계획도 함께 세우도록 당시 국무총리에게 건의했다. 하지만 이 건의는 당시 건설교통부로 넘겨졌고, 송파신도시는 주민 이주대책으로 추진하는 사업이 아니라는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앞으로 일부 행정기관이 세종시로 옮겨 간다고는 해도 서울은 수도의 정통성을 이어 나갈 것이다. 지난 광복절에는 광화문이 제 모습을 찾았고, 내년에는 남대문이 아름답게 재건된다. 서울은 풍납토성을 비롯하여 몽촌산성, 석촌동과 방이동의 백제고분 등이 조선시대 수도 유적과 함께 공존하면서 2000년 수도로 명실상부하게 발전해 나갈 것이다.
이렇듯 500년에 이르는 한성백제의 왕경유적은 경주나 공주·부여와 다르지 않은 역사적인 도시유적이다. 그러나 정부는 185년 동안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와 부여에는 유적보호와 관광개발에 수조원의 국가예산을 투입하고 있음에도, 그 뿌리인 한성백제의 왕성인 풍납토성 내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이주 문제는 외면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풍납토성의 한성백제 왕경유적은 풍납동 주민의 것이 아니라 전 국민의 유적이다. 보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면 풍납토성 주민들에게만 고통을 안겨줄 것이 아니라, 온 국민이 조금씩 고통을 분담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 더 이상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땅 밑에서 2000년 전의 왕성 유적과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는 것을 축복은커녕 저주로 받아들이는 안타까운 상황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한성백제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이명박 대통령이 풍납토성 주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고, 그래서 한성백제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도록 통큰 결단을 다시 한번 내려줄 것을 기대한다.
2010-09-1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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