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광장] 16대 대통령 노무현 변호사에게/진경호 논설위원
수정 2009-04-30 01:24
입력 2009-04-30 00:00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검찰 신문과정의 전개 방향은 세 가지일 것입니다. 예를 갖추겠으나 꽤나 집요할 검사의 신문에 ‘모른다’와 ‘아니다’를 되뇌며 증거부터 내놓으라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전혀 몰랐던 일’이라고 했다가 빠져나갈 수 없는 궁지에 몰려 검찰이 내세운 혐의사실을 일부나마 시인하는 군색한 처지를 택하겠습니까. 또 아니면 처음부터 사실은 이리 된 것이라고 말해 말초신경까지 곤두세웠을 우 검사의 맥을 탁 빼놓으시겠습니까. 인터넷 여섯 글과 검찰에 낸 서면답변서의 알려진 얼개를 보면 아무래도 상황은 첫번째로 갈 듯합니다. ‘승부사 노무현’의 결단은 잠시 접어두고, 없는 물증 뒤에서 법리의 허점을 파고드는 변호사의 현란한 언술을 국민들은 보게 될 듯합니다.
아시는 대로 18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자유민권을 강조하며 교육론 ‘에밀’을 펴냈으나 정작 자신이 가정부 사이에서 얻은 다섯 아이는 고아원으로 보냈습니다. 현실에 저항하는 인간의 비극적 결말을 그림처럼 쓴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타고난 여성편력과 술 주정으로 숱한 주위 여성들을 비극에 빠뜨렸습니다. 실존주의 사상가 장 폴 사르트르의 남성 우월주의는 20년 연인이자 동지인 페미니스트 시몬 보부아르의 삶을 페미니즘으로부터 멀리 떼어 놓았습니다. 그럼에도 루소이고, 헤밍웨이이고, 사르트르입니다. 저마다 두 얼굴을 지녔지만 사람들은 업적과 허물을 합해 나눈 평균값으로 그들을 재지는 않습니다.
14개월 전 지지자들의 박수에 묻혀 떠난 그 길을 카메라 세례 속에 피의자 신분으로 되돌아오는 두 얼굴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공은 공이고 과는 과일 뿐입니다. 평가는 본인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인과 역사가 내립니다.
본인이나 아들 중 한 쪽은 기소가 불가피하다고 합니다. ‘그럼 사랑하는 아들을 감옥에 보내라는 말입니까.’라는 말을, 퇴임한 지금은 들을 수 없는 것입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지키려는 가치는 무엇입니까. 노무현 재단을 발판 삼으려 했던 정치 2막입니까. 아니면 국민의 정신건강인가요. 두 번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원려, 그것입니까. 있는 그대로의 날것을 국민들은 원합니다. 국민을 둘로 갈랐던 ‘노무현다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지켜보겠습니다.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2009-04-30 31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