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정조 독살설/이용원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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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9-02-11 00:54
입력 2009-02-11 00:00
1993년 나온 ‘영원한 제국’은 요즘 유행하는 팩션소설의 원조격인 작품이다.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가 세상을 뜨기 직전 24시간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절대왕권을 추구하는 정조와 이에 맞서 ‘사대부의 나라’를 지키려는 노론 벽파 사이의 음모·갈등을 스릴 넘치게 묘사해 큰 인기를 모았다. 작가 이인화씨(현 이화여대 교수)는 책 후기에서 소설을 쓰게 된 계기를 고향인 영남 일대에서 어려서부터 들어온 정조 독살설 때문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이 책은 허구”라고 강조하고 “허구화를 위해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 등 여러 추리소설의 모티프를 응용했다.”고 공개했다.

허구에 불과한 정조 암살설에 치밀한 논증을 가해 역사 영역으로 끌어들이려 한 이는 역사평론가 이덕일씨이다. 이씨는 2005년 내놓은 책 ‘조선 왕 독살사건’에서 조선왕조실록 등 사서를 동원해 벽파가 정조를 제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열거했다. 특히 정조가 ‘급서(急逝)’할 즈음 약을 처방한 심인이 벽파의 영수 심환지의 친척이고, 임종할 때 유일하게 곁을 지킨 이가 최대의 정적인 정순왕후라는 데 방점을 찍었다. 어쨌거나 이인화·이덕일 두 사람이 지목한 독살의 주범은 심환지였다.

그러나 정조 연구의 대가인 정옥자 국사편찬위원장을 비롯한 역사학자들은 그동안 정조 독살설을 전면 부정해 왔다. 학계가 추정하는 정조의 사인은 일종의 과로사이며 그 직접적인 원인은 종기 때문이었다는 것. 정 위원장은 서울대 규장각 관장 시절에 한 인터뷰에서 정조는 “암살을 피하고자 새벽 닭이 울 때까지 잠을 자지 못하며 공부했고” 그러다 보니 “옷을 입은 채 잠자리에 드는 버릇이 생겨” 이에 따라 생긴 지병인 “피부병으로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정조의 어찰 299통을 분석한 결과 심환지는 정조의 대척점에 섰다기보다 심복인 것으로 드러났다. 게다가 붕어(崩御) 열사흘 전 편지에서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를 호소했다. 또 정조는 의서 ‘수민묘전(壽民妙詮)’을 편찬할 만큼 의학에 조예가 깊어 제 병에 대한 처방과 약 조제를 직접 관장했다. 독살당했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들이다. 정조 독살설은 정사(正史)의 영역에는 아직 비껴나 있다.

이용원 수석논설위원 ywyi@seoul.co.kr
2009-02-11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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