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사초(史草) /노주석 논설위원
수정 2008-12-04 00:50
입력 2008-12-04 00:00
사초는 크게 두 가지.어전회의에 배석해 보고 들은 내용인 입시(入侍)사초는 말 그대로 시정기(時政記)이다.사관은 임금에게 올라오는 모든 장계를 먼저 볼 수 있으며 왕의 비답이 적힌 문서를 열람할 수 있었다.가장(家藏)사초는 퇴궐한 뒤 집에서 인물이나 사안에 대한 평가를 기록한 내용이다.둘 다 사관 이외에는 그 누구도 볼 수 없었다.기록의 공정성과 객관성,사관의 신분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다.2부를 작성해 1부는 임금이 죽은 뒤 제출하고 1부는 개별 보관했다.
1498년 무오년에 일어난 선비들의 옥사인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사화’(史禍)라고도 부른다.피비린내 나는 당쟁이 한 줄의 사초에서 비롯된 탓이다.연산군 즉위 후 성종실록을 편찬한 사림파 영수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은 훈구파의 거두 이극돈이 전라관찰사 시절 왕후의 국상 중 기생들과 술판을 벌인 사실을 삭제해 줄 것을 요청받았으나 거절했다.이에 훈구파는 이미 사망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문제삼았다.어린 단종을 초나라 의제에 빗대 숙부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로 몰아세웠다.이때도 연산군은 문제가 된 사초의 해당 부분만 뽑아서 일별했을 뿐이라고 한다.
국회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대통령기록물 중 쌀 직불금 관련 자료를 공개토록 의결했다.최장 30년 동안 비공개 도장이 찍혔던 사초가 불과 1년도 안 돼 들춰지게 된 셈이다.진상규명도 좋지만 정권만 바뀌면 사초를 들여다보는 좋지 않은 선례가 될까 걱정스럽다.우리는 500년 가까이 실록을 편찬하면서 ‘유혹’을 이겨낸 자랑스러운 기록문화 보유국이 아니던가.‘사초의 금기’가 깨졌으니 앞으로 어떤 ‘사화’가 발생할까.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2008-12-04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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