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억새꽃/유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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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8-09-13 00:00
입력 2008-09-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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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꽃이 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명절날 선물 꾸러미 하나 들고 큰고모 집을 찾듯

해진 고무신 끌고 저물녘 억새꽃에게로 간다

맨땅이 아직 그대로 드러난 논과 밭 사이

경운기도 지나가고 염소도 지나가고 개도 지나갔을

어느 해 질 무렵엔 가난한 여자가 보퉁이를 들고

가다 앉아 나물을 캐고 가다 앉아 한숨을 지었을

지금은 사라진 큰길 옆 주막 빈지문 같은 그 길을

익숙한 노래 한 소절 맹감나무 붉은 눈물도 없이

억새꽃, 그 하염없는 행렬(行列)을 보러 간다

아주 멀리 가지는 않고 내 슬픔이 따라올 수 있는

꼭 그만큼의 거리에 마을을 이루고 사는

억새꽃도 알고 보면 더 멀리 떠나고 싶은 것이다

제 속에서 뽑아올린 그 서러운 흰 뭉치만 아니라면

나도 이 저녁 여기까진 오지 않았으리
2008-09-13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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