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미야자와 기이치/황성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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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기 기자
수정 2007-06-30 00:00
입력 2007-06-30 00:00
총리를 지낸 미야자와 기이치는 일본 정치인답지 않게 영어에 능통했다.“영어사전을 통째로 외웠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미야자와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진 뒤 그의 발음에 대해 “정통 영어다.”라며 극찬했다. 당시 미국 언론들은 “남부 사투리가 섞인 클린턴보다 미야자와의 영어가 훨씬 낫다.”고 치켜세웠다. 도쿄대학 법학부 재학 중 갔던 미국에서 자신의 영어가 회화에 쓸모없다는 사실을 통감하고 영어 공부에 매달렸다. 특히 미군정하 대장성(현 재무성)에서 미 당국과의 연락업무를 하면서 영어실력을 부쩍 키웠다고 한다.

미야자와는 대장성 시절 조사차 다녔던 시골을 몇십년이 지난 뒤 찾아서도 골목길까지 술술 댈 만큼 머리가 좋았다. 과시욕 강한 수재들이 그렇듯 학벌에 관한 집착이 유난했다. 후배 정치인이나 신문기자들에게 출신학교를 묻고는 도쿄대가 아니면 노골적으로 바보 취급을 하곤 했다. 정적이던 다케시타 노보루와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다. 도쿄대 출신으로 여기고는 “몇기생이십니까?”라고 물었는데 다케시타가 “와세다대학입니다.”라고 하자 코웃음쳤다고 한다. 게다가 “당신때 와세다대 상학부는 무시험이었다죠?”라고 응수해 다케시타를 격분케 했다. 그런 미야자와의 자식들은 도쿄대와 인연이 없어 아들은 와세다대, 딸은 게이오대를 졸업했다. 총리 자리에도 다케시타보다 4년 뒤에나 올랐다.



87세로 그제 타계한 미야자와는 몇 안 남은 일본 현대사의 산증인이었다. 이케다 하야토 내각에서 경제기획청장관으로 발탁된 뒤 통산상, 외상, 대장상을 거치며 일본의 경제부흥을 이끈 정치인으로 기록된다. 총리 취임후 첫 해외방문지로 1992년 한국을 찾은 그는 국회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죄하는 연설을 했다. 침략을 ‘진출’로 표현한 검정교과서가 외교마찰을 빚은 82년 관방장관 시절 교과서 수정을 국제공약으로 내건 ‘미야자와 담화’를 발표했다. 일본의 침략전쟁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된다는 소신에서 일본 헌법에는 손대지 말자는 호헌파였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앞으로 일본에서 자유라는 것이 없어지지 않도록 노력해 달라. 전쟁에 진 세대로서 가장 걱정하는 일이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2007-06-3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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