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씨앗의 귀향/함혜리 논설위원
함혜리 기자
수정 2007-06-14 00:00
입력 2007-06-14 00:00
‘시냇물에서부터 제일 높은 산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거리는 약 8㎞인데 이 일대 전체에 걸쳐 다양한 식물군이 펼쳐져 있습니다. 산책을 하면서 이토록 많은 식물들을 수집할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식물학자로 꽤 명성을 얻었던 벽안의 신부에게 당시의 한반도는 신천지였을 것이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산, 바다, 들, 하천으로 이뤄진 다채로운 지형은 다양한 식물종이 자라기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 다양했던 토종 종자들 중 상당수가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1970∼80년대의 국토개발 등을 겪으면서 사라졌다. 품종 보존이나 유전자원에 대한 인식조차 없었던데다, 수확량이 많고 맛이 좋은 개량 품종을 집중 재배한 탓이다. 국외로 유출된 종자도 수천종에 이른다. 특히 광복 이후 미국의 식물학자들은 한국 재래종자 수천점을 채취해 가져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은 이렇게 확보한 농업 유전 자원을 이용해 큰 부가가치를 창출했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수집해 간 토종종자 가운데 34종(씨앗 1679점)을 반환키로 했다. 코끼리 마늘, 산부추, 콩, 팥, 녹두, 강낭콩, 배추, 호박 등 국내에서는 멸종돼 찾아볼 수 없는 것 들이다. 반세기 만에 이뤄질 씨앗의 귀향을 바라보는 심정은 솔직히 착잡하다. 우리가 보존했어야 마땅한 것을 남의 나라에서 나눠받는다고 하니 부끄럽고, 그래도 미국의 종자은행 덕분에 이들 종자가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불행을 면한 것은 다행이다. 이제부터라도 토종 품종이 가진 유용한 유전자를 종자로 제대로 보존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문익점이 붓대에 감춰 가져온 목화씨가 우리 조상들을 추위에서 구했던 것처럼 씨앗 한줌이 기적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2007-06-14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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