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11월 3일’의 부활/염주영 논설실장
수정 2006-11-03 00:00
입력 2006-11-03 00:00
광주학생들의 항일시위는 순식간에 전국과 만주·중국·일본으로 파급됐다. 구호도 ‘약소민족 해방 만세’와 ‘제국주의 타도 만세’로 바뀌면서 점차 전국 단위의 학생독립운동으로 확산됐다.2년간 212개 학교에서 5만 4000여명이 궐기에 참여했으며,1460명이 검거됐다.
때때로 자랑스러운 역사가 정치적 이유 등으로 망각 속에 버려지기도 한다.‘11월3일’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일제치하에 묻어둘 수밖에 없었던 이날의 역사는 정부수립 5년뒤에야 ‘학생의 날’이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다. 당시 우익 이승만정부하에서 이 운동이 지닌 민족주의적 성격은 이념장벽을 넘지 못했다. 엄연한 ‘학생독립운동’이 성격이 애매한 ‘학생의 날’로 격하되었다. 군사독재정권은 유신 이듬해인 1973년 이마저도 국가기념일에서 제외시켰다. 독재정권에 ‘학생’과 ‘운동’은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1929년 11월3일의 거사가 77년만에 제 이름을 찾아 부활한다. 정부는 이날을 ‘학생독립운동 기념일’로 제정해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갖는다.3일 오전 10시 교육부총리 주관으로 서울 유관순기념관에서 기념식이 개최된다.2일에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학생독립운동기념일제정추진위원회가 주관하는 전야(前夜) 연회도 열렸다. 그러나 행사만으로 역사가 부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이 일은 교육부가 할 일이다. 자신이 나라를 사랑하려면 나라의 역사를 배우고, 남이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면 나라의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염주영 논설실장 yeomjs@seoul.co.kr
2006-11-03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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