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이야기 없는 청계천조형물/심상용 동덕여대 미술사학 교수
수정 2006-01-25 00:00
입력 2006-01-25 00:00
보편적인 건축물의 안과 밖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던 퐁피두센터는 프랑스 대혁명 정신의 가장 금세기적이고 건축적인 표현이었다. 퐁피두센터의 전위적인 건축디자인은 건물이 단지 삶을 방어하기 위한 수동적 조치일 뿐 아니라, 이야기의 역동적인 출처이기도 하다는 사실로 인해 지극히 현대적이면서도 동시에 역사 자체일 수 있었다.
반면 이야기, 역사, 드라마라곤 눈을 씻고 봐도 전무한 즐비한 아파트들이야말로 우리의 주거문화에 잠재되어 있는 문화적 저열함이 아니고 무엇이랴. 유감스러운 것은 역사가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했던 민족은 역사를 만들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전한다는 사실이다. 공공조형물은 그 자체로 시간을 넘나드는 하나의 이야기, 함축된 역사, 상징, 그리고 시공이 뒤얽힌 드라마다. 그것엔 바로 그 지역, 그 장소에서 살아왔고, 또 살아갈 공동체의 ‘과거-기억’,‘현재-철학’,‘미래-가치’가 반영되어 있다. 선조들로부터 들었고, 후대에게 들려주어야 할 이야기들의 통로며, 그곳에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만이 공유하는 어떤 독특한 정서의 메아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공공조형물은 당대의 미의식으로 그 지역의 역사적 보편성을 길어 올리는 작업이어야 한다. 동시대성과 역사성의 이같은 교차가 부실할 때, 공공조형물은 자칫 삶의 터전과 유리된 ‘부당한 침투’로 전락해버릴 수 있다. 그 결과는 심리적 불안과 스트레스를 고조시키고, 오히려 공동체의 해체에 관여할 수도 있다.
클래스 올덴버그의 ‘스프링’은 특히 몇 가지 점에서 ‘서울의 랜드마크가 될 것’이라던 서울시장의 호언에 반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우선 작가가 한번도 청계천을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시점에 최종 디자인이 완결되었다는 점, 더구나 정작 작품의 실제적인 제작은 한국의 한 대학교수의 공방이 맡게 되었고 따라서 올덴버그가 제공하는 것은 단지 이름과 디자인뿐이라는 점과 이 정도의 노력에 대한 과도한 지불 등. 작품의 제목 ‘스프링’이 ‘봄’ ‘용수철’ ‘샘’의 세 의미를 지님으로써 갖게 되는 매력 역시 영어권적 맥락 안에서다. 무엇보다 작가 올덴버그 자체의 문제인데, 즉 1960,1970년대의 미국적 맥락이 아니라면 그 의미가 희석되고 나이 든 팝아트의 거장과 청계천의 미미한 상호교환이다.
그러므로 청계천과 ‘한물 간’ 팝의 빈곤한 맥락에 대한 미술인들의 문제제기는 귀 기울일 만하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맥락을 모르는 시민들에게는 그것이 외국 작가에 대한 일반화된 배타성이나 임의적인 분노와는 무관하다는 점, 더 나아가 그같은 문제제기 자체가 문예적 지성이 주도하는 소통의 한 방식으로서 오히려 역동적인 문화의 일환임을 섬세한 방식으로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폴 투르니에의 말을 빌리면 ‘사람은 자기가 살고 싶은 세계를 위해 글을 쓴다.’ 내가 살고 싶은 세계는 예술이 시민들에게 전하는 이야기란 게 고작 다음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닌 세계다.“엄마, 저 긴 소라 같은 게 뭐야?”“글쎄, 잘 모르겠네. 한데 미국의 유명한 예술가래, 올덴버그라나!”
심상용 동덕여대 미술사학 교수
2006-01-25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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