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광장] 대통령님, 올 초 약속 지키셨나요/진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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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5-12-27 00:00
입력 2005-12-27 00:00
노무현 대통령님, 기억하십니까. 올해를 여는 대통령의 모습은 그 전 어느 해보다 따뜻하고 활력이 넘쳤습니다. 탄핵을 딛고 일어서 선진한국을 기치로 우리 사회의 희망을 얘기했습니다.“민주주의의 핵심은 화해와 포용”이라며 통합과 관용을 강조했습니다.“많이 배웠고, 더 넓어지려 한다.”는 말로 집권 3년차 대통령의 성숙함을 내보였습니다. 보수언론들조차 “대통령 코드가 바뀌었다.”고 반겼습니다. 의욕도 넘쳤습니다. 경제활력 회복과 양극화 해소, 정부 혁신, 투명사회 건설 등 사회 구석구석에 눈길과 손길을 건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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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호 논설위원
진경호 논설위원
올 한해 많은 걸 이뤘습니다. 균형발전을 위한 행정중심복합도시와 지방혁신도시 건설, 공공기관 이전 작업이 궤도에 올랐습니다.19년을 떠돈 방사성폐기물처리장이 주민 뜻에 따라 경주에 자리하게 됐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잡겠다던 집값, 땅값은 8·31대책으로 숨고르기에 들어갔습니다. 국방개혁의 틀도 세웠고, 사법개혁도 착실히 준비돼 가고 있습니다. 고위공무원단제 도입 등 정부혁신 또한 숨가쁠 정도로 발빠릅니다. 어느 정부보다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읍니다.

물론 이루지 못한 것도 많습니다. 먼저 양극화 해소입니다.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청년실업률도 고공행진을 이어가며 백약을 무색케 합니다. 경기가 나아진다지만 서민들은 여전히 이 겨울이 춥습니다. 북핵 문제도 좀처럼 풀리질 않습니다. 미국과의 동맹은 불안불안하고, 일본과는 수교 40년만에 최악의 관계입니다. 최대의 사회협약인 노사정위원회는 기능이 정지됐습니다.

문제는 잃은 것입니다. 민심입니다. 화해와 통합입니다. 지금의 사학법 갈등은 물론 강정구 교수 논란,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 등 해묵은 정체성 논쟁으로 서로가 등을 돌렸습니다.

얼마전 대학교수들이 올해를 대표하는 사자성어로 상화하택(上火下澤)을 꼽았습니다. 물과 불이 따로 논, 분열과 반목의 한해였다는 것입니다.2003년 참여정부 첫 해의 사자성어가 우왕좌왕이었고, 지난해는 당동벌이(黨同伐異)였습니다. 갈팡질팡하다 패를 갈라 싸우더니, 이마저도 지쳤는지 등 돌리고 앉은 형국이라는 게 이들이 매긴 참여정부 3년의 자화상입니다. 고약합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많은 국민들이 고개를 끄덕이니 말입니다.27전27패의 재·보선 성적표와 20%대의 낮은 지지율이 달리 뭘 뜻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여권에선 지금 “우리는 잘하고 있다.”는 당찬 목소리가 나옵니다. 엊그제 열린우리당 대선 3주년 기념 워크숍에서도 자화자찬이 쏟아졌다고 합니다. 몇몇 고위인사는 틈만 나면 언론 탓, 보수 탓 하기 바쁩니다. 유신독재시대에 머문 국민의식을 꾸짖는 간 큰 공직자도 있습니다. 자찬과 남탓은 문 걸고 하는 것입니다. 황우석 교수 파문의 한 쪽에서 국민들은 또 다른 좌절을 맛보고 있습니다.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이 정부의 비겁함 말입니다. 재기의 희망마저 잃는 듯해 몸이 떨립니다.

대통령께서 조만간 미래국정구상이라는 거대 담론을 내놓을 것이라 합니다. 연정론으로 한번 어리둥절했던 터라 기대보다 걱정이 앞섭니다. 혹여라도 내년 지방선거나 후년 대통령선거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기를, 말 그대로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틀이기를 바랍니다. 대통령께서 너무 높이, 너무 멀리 가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윗불이 뜨거울수록 아랫물은 차갑습니다. 반발짝 앞선 대통령의 열정이 국민과 사회를 따뜻하게 덥히는 상택하화의 새해를 기대해 봅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우리는 충분히 다이내믹합니다.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2005-12-27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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