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빨간 편지/진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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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호 기자
수정 2005-08-05 07:47
입력 2005-08-05 00:00
사무실 책상에 나뒹굴던 우편물을 뒤적이다 추루한 편지 한 통이 눈에 들어왔다. 육필로, 그것도 연필로 쓴 편지였다. 요즘 세상에 연필로 쓴 편지라니…. 겉봉에 적힌, 나이 든 필체는 정감은커녕 남루한 옷 같은 느낌만 던져주었다.‘무슨 사연일꼬…?’하면서-신문사엔 종종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비리를 제보하는 편지가 날아든다-심드렁하게 겉봉을 열었다.

‘어?신문기사네…. 아니 내 기사네…!’ 얼마 전 내보낸 기사가 오려져 담겨 있었다. 그런데 상태가 이게 뭔가. 빨간 볼펜으로 난도질돼 있는 게 아닌가. 지우고, 고치고, 들어내고, 덧씌우고…. 빨간 볼펜이 한바탕 굿판을 벌이고 간 기사엔 성한 구석이 별로 없었다. 틀린 어법과 적절치 않은 표현, 일본식 낱말 등이 모조리 손봐져 있었다.7장짜리 기사에 볼펜이 닿은 구석이 10곳을 넘었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기사를 써오지 않았던가. 벌게진 얼굴로 전화를 들었다.“저…편지 잘 받았습니다. 고맙….”“읽다가 손 좀 봤소.…그럼 됐소. 잘 쓰시오.” 원로 한글학자인 노인은 단 세마디를 던지곤 퉁명스레 전화를 끊었다.4년여가 흐른 지금도 그 분이 졸고(拙稿)를 보실까 겁난다.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2005-08-05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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