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김삿갓 북한방랑기/심재억 문화부 차장
수정 2005-07-26 00:00
입력 2005-07-26 00:00
사시(巳時) 무렵 숨을 거둔 수라 할머니의 시신이 채 식기도 전에 스피커에서는 예의 김삿갓이 북한을 들먹였다. 외아들 일찍 잃고 두 손녀 키우느라 애면글면 손바닥 닳도록 땅을 일구던 노파의 죽음에 가슴 쓰린 사람들이 한마디씩을 보탰다.“우라질, 생때 거튼 사람 약 한첩 못 쓰고 죽는 판에 뭐? 북한 동포가 어째?”
그날 저녁 상갓집에서는 스피커를 관리하는 이장과 열받은 장정 몇이 티격태격하기도 했지만, 그런 불편함도 이내 한 안쓰러운 죽음에 묻히고 말았다. 마당 가운데 모깃불 연기 매캐한 상갓집에서 상주 없는 상을 치러야 했던 그 날 이후, 내게 김삿갓은 하나의 우울한 시그널이었다.
심재억 문화부 차장 jeshim@seoul.co.kr
2005-07-26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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