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한글이 없었다면…/남기심 국립국어연구원장
수정 2004-10-06 00:00
입력 2004-10-06 00:00
세계에서 가장 먼저 활자를 만들어 쓴 민족이면서 그 활자 인쇄 기술을 크게 활용하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가 한글을 가지게 된 이후에도 이런 편리한 문자를 만족스럽게 이용했다고 할 수 없다.남보다 먼저 발명한 활자의 기술과 한글이 잘 활용되었더라면 우리의 문화가 벌써 한발 앞섰을 텐데 지난 조선조 몇백 년 동안 한글의 사용을 천시하기만 했다.
그런데,오늘날 우리가 정보 산업에 커다란 발전을 이루어 남보다 앞서 나가고 있는 것은 한글 같은 훌륭한 문자를 가진 덕택인데,아직도 제 글을 어법에 맞게,그리고 규범에 맞게 쓰지 못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한글날이 공휴일의 지위를 박탈당한 지 십 년이 넘었다.우리 민족의 오늘날의 번영은 한글로 인해 문맹이 없고,따라서 높은 교육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요,그것은 한글의 창제에서 비롯된 일인데 한글날이 공휴일의 지위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보다도 남들이 이해를 하기 어려울 일이다.한글날은 광복절보다도 한 단계 위에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우리가 일제에 국권을 잃었던 삼십육 년은 오천 년의 긴 역사로 보면 그저 잠시 동안의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랑할 일도 아니다.그런데 우리는 민족정신이 살아 있었다는 것을 삼일운동으로 되새긴다.이렇게 보면 광복절보다는 한글날이 공휴일이 되어 더 큰 경축 행사가 있어야 함직하다.옛날에,문맹이 구십 퍼센트가 넘던 개화기 때 박영효,유길준,서재필 같은 선각자가 공문서를 비롯한 모든 문서와 신문,잡지를 한글로 쓰자고 한 것은,그렇게 해서 모든 국민이 온갖 지식과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민주,민본 법치주의가 정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요,오늘날 그것이 실현되지 않았는가?
한글은 그 모양이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고,또 한글의 자모음자를 모두 조합하면 수천 개의 음절을 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직 문자가 없는 언어가 빌려다가 써도 불편이 없다.대외적으로 크게 선전해 볼 수 있을 것이다.한글날을 맞아 다시 한번 긍지를 가져도 좋지 않겠는가?
남기심 국립국어연구원장
2004-10-06 23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