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국보법, 보안에서 평화로/양길현 제주대 정치학 교수·명예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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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4-10-01 08:00
입력 2004-10-01 00:00
국가보안법 개폐 논쟁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법을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입장부터 소폭 또는 대폭 개정,그리고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각각의 입장에 따른 논리와 정당화 주장은 이미 오래전 제기되어 잘 알고 있는 사안이다.이렇게 국보법 개폐를 둘러싸고 각각의 입장이 조정되지 않고 평행선을 긋게 된 까닭에는,북한을 바라보는 시각과 인권신장의 가치에 대한 판단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견해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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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길현 제주대 정치학 교수
양길현 제주대 정치학 교수 양길현 제주대 정치학 교수
명예논설위원
문제는 1953년 국보법 제정 이후 50여년간 세상이 많이 변했지만,우리의 생각이나 입장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이 때문에 국보법에 대해 오랫동안 의견을 달리해 왔던 두 입장을 조정하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여야가 홍보전을 펼치고 원로들이 성명을 발표하는 등 설전을 벌이는 것으로는 이렇게 해묵은 난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국보법 개폐와 관련해 여야뿐만 아니라 정부기관간의 견해도 엇갈려 입장 조정이 더욱 어려워 보인다.인권위원회의 국보법 폐지론,헌법재판소·대법원의 국보법 존치론은 각 기관의 존재이유와 기본적 성향에 비추어 예견된 것이다.

만약 인권위원회가 인권신장이라는 목표에 비추어서 인권침해법인 국보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권고를 하지 않는다면,인권위는 주어진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면할 길이 없다.

이에 반해 헌재·대법원의 국보법 폐지 반대 입장은 헌정질서 보위에 대한 사법부의 막중한 책임감의 표시일 것이다.그렇지만 헌재·대법원이 이 문제에 대해 집단적으로 의사 표명한 것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왜냐하면 사법부가 인권신장보다는 국가보위에 치우치는 편향성을 보임으로써 결국은 운신의 폭을 줄이고 조정자적 역할을 맡기가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헌재·대법원의 위상을 존중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되리라 보기 때문에,국보법 논쟁은 소폭 개정이냐 대폭 개정이냐로 축소되는 듯싶었다.

국보법을 어떻게 개정할 것이냐로 흘러가던 논쟁은 노무현 대통령이 국보법 폐지 당위성을 언명하면서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소폭개정이냐 대폭개정이냐의 논의에서 대폭개정이냐 폐지(대체입법 내지는 형법 보완)냐의 논의로 방향을 틀게 된 것이다.국가안보를 책임진 노 대통령의 의중이 국보법 폐기로 전해지면서 이제 국보법 폐기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었다.

국회 의석 판도로만 보면 열린우리당-민노당-민주당의 폐지론이 한나라당-자민련의 개정론보다 수적 우위에 있어서 결국 대통령과 집권 여당의 결심이 중요하게 되었다.이 때문에 패배의식을 느낀 한나라당과 보수 원로들의 반대 입장 개진이 잇따르고 있다.국보법 논쟁은 이렇게 2004년 가을 정국에서 인권신장이라는 대의와 국가보안이라는 전통적 정서 사이의 첨예한 의견 차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현 시점에서 해결책은 국회에서의 정치적 결단이다.인권신장이라는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당론이 중요하다.다만 헌재·대법원의 위상과 한나라당의 입장을 존중해 주는 방향으로의 조정을 위해서 단계적 접근은 어떤가.첫 단계는 인권신장을 위해 일단 국보법은 폐지하는 것이다.그러고는 다음 단계에서 헌재·대법원·한나라당 등의 정서적 우려를 부분적으로 반영하면서 남북화해라는 21세기적 정세 변화에 적극적으로 조응하는 방식으로,예를 들면 ‘평화촉진법’(가칭) 등 새로운 이름의 법을 제정하자는 것이다.왜냐하면 안보는,국보법보다는 평화를 창출·증대·확산시킴으로써 더욱 공고히 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양길현 제주대 정치학 교수·명예논설위원
2004-10-01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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