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뇌신시대/심재억 생활레저부 차장
수정 2004-03-31 00:00
입력 2004-03-31 00:00
선생님이 간밤에 과음하신 것 같습니다.그런 날이면 선생님,틀림없이 뇌신 심부름을 시키곤 했습니다.그 뇌신이라는 게,네모 반듯한 종이갑에 들어 알약 같지만,뜯어보면 옛날 조제약처럼 흰 종이에 싼 가루약 10봉지가 가지런히 들어 있었습니다.약을 드신 선생님은 포갠 두 손 위에 머릴 얹고 끝종이 울리도록 그렇게 계셨습니다.홀어머니와 단 두 식구인 그 선생님의 통음에 아린 사연이 있음을 나중에 알았습니다.그날 하굣길,동네 아낙들 우물가에서 입방아를 찧습니다.“박선생이 노모 땜시 또 파혼 당했대,글쎄.”
아지랑이 이는 봄날,젖은 땅 꽃자리에 모종처럼 아픔을 꼭꼭 눌러 심던 그 선생님의 ‘숙취의 시절’이 약종이에 묻어난 뇌신 가루처럼 풀풀거립니다.젊은 날,누군들 그런 아프고 힘겨운 기억 하나쯤 없겠습니까?
심재억 생활레저부 차장˝
2004-03-31 4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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