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트트랙과 피겨 스케이팅 경기가 열린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스케이팅 아레나. 밀라노 류재민 기자
내돈내산 올림픽…시작부터 꺾였다750유로.
한국인이 외국 여행을 할 때 놀라는 이유 중 하나는 단위에서 오는 충격 때문일 겁니다. 1만원을 일상에서 기본적으로 쓰는 한국인이 보기에 750이라는 숫자는 어쩐지 만만해 보이는 느낌이 있기 때문인데요. 그 750유로가 얼마인지 검색해보는 순간 130만원에 육박한다는 걸 알고는 화들짝 놀라기 마련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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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기다림 끝에 마침내 나온 쇼트트랙 B등급 티켓. 가격은 260유로(약 45만원).
750유로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피겨 스케이팅 경기를 보기 위해 필요한 최고 등급 좌석의 가격이었습니다. 올림픽 경기는 A, B, C 등급으로 나뉘는데 A등급이 그랬습니다. 안 그래도 고환율에 원화가 녹아내린다고 절규하는 시대이다 보니 한국 가격으로는 더 비싸진 여파도 컸는데요.
그렇다면 다음 등급 가격은? 550유로였습니다. 90만원을 조금 넘네요. 최하 등급 가격은 280유로. 우리 돈으로 48만원 정도. “이 정도면 볼 수 있겠는데?” 했던 희망은 그저 희망이었을 뿐이고요. C등급은 물론 B등급 좌석까지 진작에 팔려나간 탓에 남는 건 750유로 좌석밖에 없다 보니 근근하게 살아가는 소시민 입장에서는 결국 눈물을 머금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에서 남자 1500m 은메달을 딴 황대헌(왼쪽) 선수와 여자 1000m 동메달을 딴 김길리 선수. 밀라노 류재민 기자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이하 밀라노 올림픽)은 안 그래도 물가가 비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리는 탓에 가격이 만만치 않다는 평가가 여기저기 나왔습니다.
실제로 2018 평창 동계올림픽보다도 티켓 가격이 훨씬 비싼데요. 피겨 스케이팅을 놓고 비교해보면 평창은 A석이 55만원이었으니 2배 이상 비싼 상황입니다.
그래도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일 밀라노 올림픽을 포기할 수는 없는 터. 비행기 왕복값에 숙소비까지 돈이 들어간 마당에 이미 피겨 스케이팅에서 충격을 받고 본 쇼트트랙 가격이 저렴해 보였던 것은 착각일까요.
가격은 A석이 450유로(약 77만원), B석이 260유로(약 45만원), C석이 150유로(약 26만원). 마찬가지로 A석밖에 남지 않았지만 매일 퇴근 후 며칠에 걸친 새로고침 끝에 B석을 겨우 구할 수 있었습니다. 황대헌 선수가 은메달을 땄던 남자 1500m, 김길리 선수가 동메달을 땄던 여자 1000m 경기였고 2경기 합쳐 피겨 스케이팅 1경기보다 싸다는 위로 속에 만족해하면서요. 쇼트트랙도 평창은 A석이 55만원, B석이 35만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역시나 밀라노는 비쌌습니다(대한민국 만세!).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습니다. 쇼트트랙을 잘하는 국가는 한정적이고 경기를 볼 사람들도 제한적일 텐데 어떻게 이렇게 표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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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가격보다 10만원 정도를 더 붙여 판매하는 암표상.
역시나 암표상이 문제였습니다. 대회 조직위가 공식 홈페이지에서 재판매가 이뤄지는 경우가 아니면 되파는 행위를 엄격하게 제한한 것을 비웃듯이요.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암표 시장 차단, 가격 폭등 방지, 관람 접근성 확보 등을 명분으로 내세워 엄포를 놨지만 암표상들에겐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어차피 어느 좌석이든 경기 보는 것은 똑같단 생각에 그토록 애가 타게 찾던 C석은 이미 암표상들이 점령해놨던 상황. 원가보다 가격을 더 붙여 판매하는데 B석보다는 싸게 파는 교묘한 수법이 사람 심리를 참 묘하게 자극합니다. ‘사느냐 죽느냐’를 놓고 깊이 고민했던 햄릿보다 더 깊은 고뇌에 빠졌지만 한국에서도 사기당하기 쉬운 중고 거래를 외국에서까지 했다간 큰일이 날 것 같아 결국 포기했습니다.
암표상들이 표를 못 팔고 망하고 돈 날리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티켓 원해? 친환경 뒤에 숨은 장삿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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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올림픽 디지털 티켓(왼쪽)과 종이 티켓 가격. 밀라노 류재민 기자
갈수록 올림픽이 친환경을 내세우는 가운데 밀라노 올림픽에서는 종이 티켓 대신 디지털 티켓을 선택했습니다. 앱을 내려받아 경기장에 입장할 때 찍고 들어가는 방식인데요.
하지만 종이 티켓이 없던 이유 중 하나는 결국엔 또 돈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수수료 붙여 산 티켓인데 종이 티켓을 사려면 개당 2.99유로에 배송비 12.99유로를 내라나요. 내 돈 주고 샀는데 종이 티켓도 없고, 얻고 싶으면 3만원을 또 내라니. 괘씸한 마음부터 들어 이번에는 눈물을 머금지 않고 과감하게 포기했습니다.
올림픽은 갈수록 돈의 잔치가 되는 흐름을 보이고 있는데 이번 올림픽에서는 특히 더 두드러진 분위기입니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을 유치한 러시아도 잘 사는 나라가 아니었고, 한국은 평창에서 러시아보다 저렴하게 티켓을 팔았고,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은 팬데믹으로 중국이 자국민만 일부 허용했을 뿐이라 더 비교되는 듯합니다.
순수하게 출범했을 올림픽은 이제 돈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메가 스포츠 이벤트가 됐습니다. 광고 노출에도 적극적이고요. AP통신은 19일 ‘스폰서들이 동계올림픽에서 브랜드 명칭 노출 등 경기장 내 홍보 활동을 더욱 눈에 띄게 하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를 다루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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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기념품점을 찾은 사람들이 계산하기 위해 줄지어 서 있는 모습. 밀라노 류재민 기자
AP통신은 “올림픽 헌장에는 ‘올림픽 경기장 내 모든 로고 노출은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되어 있지만 IOC는 점차 규제를 완화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IOC 직원들이 TV 중계에 잡히지도 않는 경기장 화장실 핸드 드라이어에 붙은 제조사 로고까지 테이프로 가려놨는지 확인할 정도였는데 이제 제품들이 경기장 곳곳에 모습을 드러내는 상황이라는데요.
이에 대해 안느 소피 부마르 IOC 마케팅 담당 이사는 “우리는 파트너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며 “스폰서 제품이 이제 더 자연스럽게 노출될 수 있다”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2024년 파리 대회 당시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 그룹이 루이뷔통 브랜드를 자주 노출해 브랜드 홍보 효과를 톡톡히 누린 여파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IOC는 2028년 로스앤젤레스 대회에 경기장 명칭권 판매도 승인한 터라 올림픽 상업화가 더 속도를 낼 것으로 전망됩니다. 그렇게 번 돈을 티켓 가격을 낮추는 데 쓰면 좋을 텐데 그 반대로 가고 있으니 올림픽은 점점 일반인들이 보기 어려운 이벤트로 전락하는 게 아닌가 우려가 큽니다.
올림픽 장사에 함께 뛰어든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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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포리오 아르마니와 협업한 이탈리아의 올림픽 기념옷. 가격은 1800유로(약 307만원). 밀라노 류재민 기자
개최국 이탈리아 역시 올림픽 장사로 한몫 챙기려는 눈치입니다.
대회 시작 전 ‘올림픽 특별요금’을 도입한 탓에 버스를 못 타고 집까지 걸어간 소년의 이야기는 잘 알려졌지요. 영하의 날씨 속에 약 6㎞ 정도를 걸어갔다는데 지역에서는 올림픽 비용을 주민에게 전가한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숙박 가격도 어마어마하게 올랐는데 안 그래도 고가인 코르티나 지역은 더 많이 올랐다고 합니다. 경기 티켓과 호텔 숙박, 라운지 이용을 묶어 파는 공식 패키지도 있는데 차마 엄두가 안 나는 가격에 대체 누가 살까. 바가지를 그래도 단속해 보겠다고 정부가 나섰던 한국을 생각하며 작고 소중한 월급으로 살아가는 K직장인으로서는 ‘그들이 사는 세상’을 맛만 본 채 조용히 창을 닫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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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소중한 피규어의 가격은 35유로(약 6만원). 밀라노 류재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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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여자 쇼트트랙 대표팀이 19일(한국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스케이팅 아레나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여자 계주 3000m 은메달을 목에 걸며 기뻐하는 모습. 이들이 입은 옷의 가격은 670유로(약 114만원)다. 밀라노 로이터 연합뉴스
이탈리아는 특히 올림픽 굿즈를 통해 왕창 벌고 싶은 마음이 보입니다. 이탈리아 선수단이 입는 옷은 명품 브랜드 아르마니에서 만든 옷인데 현지에서 파는 가격이 670유로(약 114만원)에 달합니다. 평창 롱패딩이 14만 9000원의 정직한 가격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무척이나 비싸지요. 심지어 최고급 명품 옷은 1800유로(약 307만원)였는데 혹시나 만져봤다가 사라고 할까 봐 멀리서 소심하게 눈으로만 구경하다 왔습니다. 대회 중반 찾았을 때도 재고가 대회를 시작한 수준으로 남아 있었으니 과연 어떻게 될지 궁금하긴 하네요.
이탈리아가 이번 올림픽을 개최하는 데 드는 비용은 약 50억~60억 유로(약 8조 5000억~10조원) 정도로 추정됩니다. 기존 시설을 활용한 덕에 새로 경기장을 짓느라 평창 때의 약 14조원보다는 저렴하다고 하는데요.
올림픽이란 것이 항상 빚더미 잔치이고 대회가 끝나면 남는 빚이 어마어마하다 보니 큰 후유증을 겪기 마련인데 과연 이탈리아는 어떨지 궁금합니다. 이렇게 여러 가격을 올린 것도 그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한 차원이겠지만 과연 일반 시민들의 삶에 아무런 여파가 없을지 걱정도 되고요. 남의 나라 걱정할 때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이 비싼 올림픽을 아깝지 않게 하는 것은 경기장에서 중계화면으로는 느낄 수 없는 선수들의 땀과 열정, 생생한 감정선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합니다. 선수들이 최선을 다해주는 모습을 보는 것을 대체할 수 있는 가치는 없을 테니, 고민 끝에 경기장을 직접 찾은 분들이 멋진 추억을 남기셨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밀라노 류재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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