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슬픔
수정 2019-08-05 01:52
입력 2019-08-04 22:40
[지금, 이 영화] ‘나는 예수님이 싫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예수님은 신약 성서의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알라딘의 소원을 들어주는 지니와 같은 정령에 가깝다. 예수님은 유라가 뭔가를 바라 기도를 하면 이루어 준다. 예컨대 시골 마을로 전학 온 유라가 “학교에서 친구가 생기게 해 주세요”라고 하자, 동급생인 카즈마(오오쿠마 리키)와 단짝이 된 것도 기도발―예수님의 신통력이었다. 심지어 “돈 좀 주세요” 하는 기도도 어떻게든 들어준다. 액수가 크지 않아서 그렇지. 여기까지만 보면 예수님은 유라의 구세주가 분명하다. 한데 불현듯 이런 의심이 든다. 지니가 들어줄 수 있는 소원도 개수와 한계가 정해져 있지 않나. 혹시 예수님의 능력도 그렇지 않을까.
유라가 가장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순간에 예수님이 그를 돕지 않는다면, “나는 예수님이 싫다”고 유라는 얼마든지 외칠 수 있을 테다. 구약 성서의 욥도 그랬다. 그는 신에게 반문한다. “어째서 하나님은 나를 피하십니까? 어째서 나를 원수로 여기십니까?” 신은 사탄이 욥의 재산을 빼앗고, 자식들을 죽이고, 몸에 악성 종기가 나도록 허락했다. 이러니 욥의 아내도 탄식하는 것이다.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서 죽는 것이 낫겠어요.” 물론 ‘욥기’는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욥이 받아들여야만 했던 영문을 알 수 없는 상실과 이것이 야기하는 고통의 문제는 명쾌하게 해소되지 않는다.
허 희 문학평론가·영화칼럼니스트
2019-08-05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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