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톡톡 다시 읽기]<14> 캉유웨이 ‘대동서’
수정 2010-05-03 00:36
입력 2010-05-03 00:00
100년전 캉유웨이는 말했다 “경계를 무너뜨려야 유토피아”
●삶은 왜 이다지도 고통스러운가!
그렇다면 캉유웨이는 왜 가족을 해체하고, 국가를 없애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을까? 그는 삶이 고통이라고 보았다. 그의 주변에는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나라는 전쟁통이고, 주위에는 가난과 차별로 인한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고통은 왜 발생하는가? 그가 내린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원인은 ‘경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물들은 원래 자기에게 맞는 것들은 끌어당기고, 자기에게 맞지 않는 것들은 버린다. 그렇게 해서 자연스럽게 자기에게 적합한 관계들을 맺어 나가는 법이라고 그는 말한다. 공자가 말하는 인(仁)이나, 부처가 말하는 자비, 예수가 말하는 사랑, 그리고 과학자들이 말하는 인력이 말만 다르지 다 이 끌어당기는 힘을 말한 것이라는 거다. 그의 말처럼 하물며 자석도 끌어당기는데 사람이라고 안 그러겠는가. 그러나, 이런 적합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장애가 있다. ‘경계’가 바로 그것이다. 가족, 국가, 인종, 남녀, 계급 등등의 ‘경계’. 이러한 경계들이 있어 적합한 관계 속에서 서로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을 방해한다. 그는 말한다. 모든 고통의 원인은 이런 경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이 경계를 철폐해야 모두가 고통 받지 않고 행복한 세상이 온다고.
●경계를 없애라. 가족, 국가, 인종, 성별도!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경계는 사라져야 한다. 끌어당기는 힘들을 가로막는 아홉 가지 경계, 이것을 철폐해야 유토피아인 대동(大同)의 세상이 온다는 것이다. 대동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래 만물이 하나였던 세상에 이런 경계들 때문에 얽매임이 발생하고, 고통이 생겨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몇 가지 대표적인 경계에 대해서 살펴보자.
사람들은 가족이라는 경계가 있어 자기 자식만, 자기 부모만 편애하기 때문에 여러 사달이 일어난다. 주위를 둘러보면 잘 알 수 있다. ‘내 가족은 소중하다.’에서 ‘내 가족만 소중하다.’로, 그리고 ‘내 가족을 위해서는 뭐든지 한다.’로 이어지는 생각의 고리들이 만연해 있다. 이들은 단지 한끝 차이일 뿐이다. 따라서 캉유웨이는 묻는다. 그럼, 가족을 없애고 모두 똑같이 사랑하면 되는 거 아닌가? 왜 꼭 자기 가족만 사랑해야 하는데? 가족 아니면 남이라는 이 구도를 없애면 되는 거 아닌가? 그래야만 평등한 사랑이 가능하지 않느냐고 그는 묻는다. 앞에서 결혼제도를 없애라고 한 것 역시 이러한 가족제도를 철폐하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국가라는 경계도 없애야 한다. 국가를 그냥 둔 채 전쟁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호랑이나 이리에게 채식을 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전쟁을 막기 위해 만든 국가가 전쟁을 양산하는 악순환에 있다고 본다. 그가 보기에 국가 간 경쟁이라는 구도 속에서 평화란 있을 수 없다. 설혹 평화가 있더라도 그것은 잠시의 휴전일 뿐, 평화는 아닌 것이다. 따라서 국가 그 자체를 없애고, 하나의 대동 세상으로 합쳐야 한다는 것. 어떤가. 가족과 국가를 넘어서는 놀라운 상상력. 현재 가족이, 국가가 이토록 중요하게 떠오른 것은 원래부터 가족이나 국가가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것들이 다 사라지고 오직 가족과 국가 밖에 남은 것이 없어서가 아닐까.
●유토피아, 또 다른 장소를 사유하는 무기
그가 그리는 유토피아인 대동세상은 가족, 국가뿐만 아니라 모든 경계가 사라진다. 더욱더 놀라운 점은 이러한 것들이 단지 언설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거다. 그는 구체적으로 세부 계획까지 다 그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가 그리는 유토피아는 단순히 ‘비-장소(u-topia)’가 아닌, 현재를 ‘넘어서는-장소’라 할 수 있다. 이는 쓸모없는 공상이 아니라 미래를 바로 ‘지금, 여기’로 가지고 오는 새로운 상상력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런 상상력은 우리를 익숙한 것들로부터 해방시켜 ‘지금, 여기’를 다시 한번 사유할 수 있게 해주는 무기가 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캉유웨이의 ‘대동서’를 다시 읽는 것은 단지 현실에서 실패한 어느 한 지식인의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우리를 다시 한 번 사유케 하고, 또 다른 새로운 장소(topos)를 향한 실험을 가능케 할 수 있는 힘이 되지 않을까.
김태진 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2010-05-03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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