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욱 월드포커스] 뿌리치기 힘든 종전선언의 유혹
수정 2007-10-31 00:00
입력 2007-10-31 00:00
종전선언의 주체에 대한 시비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이번에는 선언을 언제 하느냐는 문제가 불거져나왔다. 청와대 안보실장은 종전선언이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기 위한 협상의 시작이라고 했지만, 외교부 장관은 평화체제를 협상하는 과정의 일부로 이해한다고 말했다. 종전선언을 하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협상이 시작될 것이라는 게 청와대의 입장인 데 비해, 외교부는 평화협정 논의를 위한 구체적 여건이 갖추어져 비로소 정전선언이 가능하다고 했다.
여기서 어느 쪽의 생각이 맞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청와대와 외교부가 똑 같은 문제를 각각 다른 입장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라는 시각에서 문제를 본다. 청와대는 종전선언을 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전쟁을 종식시킨 대통령을 만들어보고 싶어하는 듯하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개발 그리고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종전선언까지 하게 되면 적어도 남북관계에서의 대통령의 업적은 대단한 것이 될 수 있다. 대통령이 역사에 보다 훌륭한 기록을 남기기를 원한다고 해서 인색해할 필요는 없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청와대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무리하게 일을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 선언을 한 다음에도 한반도가 전쟁의 위협에서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면 선언은 우스갯거리가 되고 만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핵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북한이 핵 시설의 불능 단계를 끝내고 보유한 핵 물질을 모두 성실히 신고해야 한다. 금년 말까지 이런 일들이 끝날 것이라는 게 힐 차관보의 말이지만 아직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특히 최근 주변의 정세를 보면 걱정스러운 일이 한 둘이 아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이란에 대한 제재조치를 강행하려 하고 있다. 이란이 핵시설을 건설하고 있고 이라크 반군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혼자라도 이란의 혁명수비대에 대한 제재를 강행하겠다는 입장이다. 은행도 네 곳이나 자금을 동결했다. 게다가 미국 내에서는 다시 보수파들이 강경입장을 내놓고 부시를 압박하고 있다.
가장 위험한 것은 부시가 이란을 보는 시각이다. 그에게 이란은 미국을 파멸시키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불사하는 악의 축일 뿐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상황을 5년 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당시와 유사하다고 말한다. 부시 자신도 얼마 전에 세계 3차 대전 가능성을 거론한 바 있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중동 정세는 치솟는 기름값만큼이나 불안지수가 높아지고 있다. 게다가 북한과 관련이 있는 시리아의 핵시설에 대한 의문이 다시 나오고 있다. 비관할 필요는 없지만 정말 신중해야 할 때이다.
종전선언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한반도에서 지난 반세기 이상 지속되어온 정전체제를 없애고 평화체제로 가는 새로운 길을 열어놓으려 하는 것이지만 주변의 여건은 그렇지 않다. 국제정치에서 선언처럼 화려하면서도 실속 없는 행동도 없다. 선언이 나쁠 거야 없지만 그것이 실속 있는 역사적 업적이 되기 위해서는 여건이 숙성될 때까지 기다리는 현명함이 있어야 한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2007-10-31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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