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林(750)-제6부 理氣互發說 제4장 儒林(7)
수정 2006-12-07 00:00
입력 2006-12-07 00:00
제4장 儒林(7)
맹자 역시 ‘등문공 하편’에서 공자가 후세에서라도 자신의 정치적 이상의 실현을 기대하고자 자신의 뜻을 담은 춘추를 지었음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도가 쇠미해지고 사설(邪說)과 폭행이 생겨나며, 신하로서 자기 임금을 죽이는 자가 생기고, 자식으로서 그 애비를 죽이는 일이 생겨나니, 공자는 두려워서 춘추를 지으셨다. 춘추는 천자로서의 할 일이다.”
이처럼 춘추가 공자가 직접 지은 유일한 경서라면, 나머지 경전들은 사마천의 ‘이미 주실은 쇠미해져 있었고, 예·악은 황폐해졌으며 시·서는 흩어져 없어졌다. 그래서 공자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하·은·주의 3대의 예를 주석하고, 고서·전기들을 정리하였다.’는 기록처럼 공자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 그 무렵 전해 내려오던 시(詩)들과 노래(樂), 예(禮)와 서(書), 그리고 역(易) 등을 총정리하여 집대성 해놓은 경전들이었던 것이다.
그 중 ‘시경(詩經)’은 중국 최초의 시가집으로 중국문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유가의 경전 중 하나인데 논어에 보면 이에 대해 공자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위나라로부터 노나라로 돌아온 뒤에야 음악이 올바르게 되고 아(雅), 송(頌)이 제각각 올바른 자리를 찾게 되었다.”
사기에 의하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던 3000여편의 시 중에서 공자는 중복되는 것을 빼어내고 예의에 합당하는 305편의 작품만을 취하여 시경을 편찬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공자는 평소에도 시의 중요성에 대해 논어 속에서 이렇게 술회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대들은 왜 시경을 공부하지 않는가. 시는 사람의 감흥을 일으켜주고, 사물을 올바로 보게 하여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게 하며, 은근히 불평을 할 수 있게 한다. 가깝게는 어버이를 제대로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올바로 섬길 줄 알게 하며, 새나 짐승, 풀, 나무들의 이름도 많이 알게 한다.”
공자가 이처럼 시를 사랑하여 시경을 편찬하였던 사실은 훗날 시경이 유가의 가장 중요한 경전 중의 하나로 자리를 차지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 이로 인해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시가 크게 성행하여 중국전통문학의 중심을 이루며 발전되는 문화 혁명의 교과서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공자야말로 이처럼 위대한 사상가였을 뿐 아니라 정치가, 교육자, 역사가, 음악가, 그리고 문학가라고 불릴 만큼 전인적(全人的)인 세계인, 즉 코스모폴리탄이었다는 점일 것이다.
2006-12-07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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