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칼럼] 일구의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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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6-09-20 00:00
입력 2006-09-20 00:00
오래 전부터 기획해왔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아직 실천에 옮기지 못한 계획이 하나 있다. 남북, 그리고 해외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이 통일문제를 주제로 모여 전문적인 논의를 해왔던 ‘남북해외통일학술회의’와는 다른 형식과 내용의 모임이다. 남과 북, 그리고 해외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종교·과학과 기술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전문가들 가운데 몇 사람을 선정, 간담 형식으로 진행하는 모임인데 장소는 판문점이다. 서울이나 평양이 아니라 판문점을 택한 까닭은 판문점이라는 장소가 참석자들에게 주는 민족사적인 무게 때문이다. 또 간담회이기 때문에 학술회의처럼 까다로운 격식을 취하지 않고 자유스럽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그것을 녹음으로 남겨 정리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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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교수
송두율 교수
그러면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눌 것인가.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 우리 민족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라는 질문에 대해서 참석자들은 그 대답을 단지 한 단어로써 표현하라는, 어려운 주문의 간담회를 열게 된다. 전문분야가 다르기에 참석자에 따라 서로 다른 대답이 나올 수 있다. 어떤 참석자는 ‘민주’라고, 다른 참석자들은 ‘정의’,‘평화’,‘사랑’ 또는 ‘아름다움’이라는 식으로, 대답은 여러 가지로 나올 수 있다. 물론 그러한 개념들을 하나하나 정확하게 정의하라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지적처럼 그것은 공놀이하는 어린애들에게 엄격한 규율에 따라 놀이를 해야 한다는 것처럼 부질없는 일일 수도 있다.

일본에서도 1980년대에 비슷한 발상 아래 이른바 사회원로들이 간담회 형식으로 이야기를 나누어 일본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나 이념을 한때 ‘아름다움’으로 정리한 적이 있다. 그 후 ‘아름다움’은 ‘부국유덕(富國有德)’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차기 총리로 거의 확실시되고 있는 아베 신조(安倍晋三)는 최근 ‘아름다움’을 다시 들고 나온다.

일반적으로 ‘아름다움(美)’은 참(眞)이나 선(善)과는 달리 특이한 정치적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강하게 전달한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으로부터 막스 베버는 진위나 선악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아름다움’의 특별한 의미를 읽었다. 또 이른바 탈현대적(脫現代的)인 분위기 속에서 미학과 윤리학의 통일문제도 다시 강조되고 있다. 날로 발달하는 정보매체의 힘을 빌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상적인 정치가 이미지로 잘 포장되어 대중을 동원하는 정치의 심미화(審美化)도 강조되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일본의 보수세력이 또다시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도 지켜볼 대목이다.

간담회의 기획의도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일본과 달리 분단 속에서 오늘을 보내는 남북이 함께 동의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나 이념을 도출하는 일이 쉽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참석자는 ‘자유’를, 또 어떤 참석자는 ‘주체’를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대답은 민족분단의 상황에서 이른바 세계화로 표현되는 엄청난 도전을 맞아 남북이 합의할 수 있는 가치가 진정 무엇일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기에 더 이상 교과서적인 대답으로 끝날 수는 없다.

어떤 당위적인 전제로부터 하나의 가치를 먼저 확정하는 연역적(演繹的)인 방법이 아니라, 분단이 빚어낸 체험공간 속에서 서로 달리 살아왔기 때문에 서로 다른 기대지평을 가질 수밖에 없는 참가자들이 서로 다른 경험세계로부터 어떤 보편적이고 가능한 원칙을 찾는, 일종의 ‘발견적 교수법(heuristics)’을 필자는 기대하고 있다. 선문답에서 일구(一句)는 가장 중요한 한마디를 뜻하며 만약 우리가 그 것에 집착하다 보면 어느새 늙어버린다고도 가르친다. 그러나 이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민족적 일구는 하나의 업보가 아니겠는가. 일본의 맥락과는 다르지만 필자의 일구는 ‘아름다움’이다. 우리 모두 일상생활에 쫓기지만 각자가 한번쯤은 민족의 미래에 관한 진정한 일구가 무엇일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여유를 가졌으면 한다.



독일 뮌스터대학 사회학 교수
2006-09-2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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