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林(512)-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
수정 2006-01-05 00:00
입력 2006-01-05 00:00
제2장 居敬窮理(2)
시에 나오는 수사(洙泗)는 공자의 고향인 산동성 곡부를 가로지르는 수수(洙水)와 사수(泗水)의 두 강줄기를 말하고 있음이다.
따라서 ‘시냇물은 수사에서 나뉜 가닥’이란 구절은 퇴계의 학문이 공자의 도를 이어 받고 있음을 은유하는 표현이었으며 또한 ‘무이산(武夷山)’은 중국 복건성과 강소성에 걸쳐 있는 산으로 송나라 때의 대성리학자였던 주자가 살았던 산이었다.
주자는 이곳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제자를 받아들여 강학을 펼쳤었다. 중국의 명차 우롱차(烏龍茶)의 원산지이기도 한 무이산은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자연유산으로 손꼽힐 만큼 중국최고의 절경을 자랑하는 명산인데, 주자는 바로 이곳에서 주자학을 성립하였던 것이다.
특히 주자는 무이산을 사랑하여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란 유명한 시를 남긴다. 이 시에서 ‘구곡에 다다르니 눈앞이 확연히 트이는데/상마(桑麻)에 맺힌 이슬 평천(平川)을 바라보네/뱃사공 다시금 무릉도원 가는 길을 찾지만/이곳이 바로 인간세계의 별천지라네.’라고 노래함으로써 무이산이 자신의 이상향임을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
따라서 율곡이 서당 앞을 흐르는 냇물을 ‘수수와 사수’에 비유하고, 서당 뒤의 산을 무이산으로 비유하였던 것은 퇴계가 바로 공자와 주자의 유림을 이어받은 유가의 종지(宗旨)임을 찬양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율곡은 자신을 ‘거친 물결(狂瀾)’이라고 의미심장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그 무렵 율곡이 자신을 미친 물결처럼 광분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난데없이 찾아온 젊은 청년 율곡을 받아들인 퇴계의 마음은 어떠하였음일까.
이미 퇴계는 ‘해동공자’라고 불릴 만큼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 그러한 퇴계가 23세의 청년 율곡을 알고 있기나 하였음일까.
율곡이 훗날 9번이나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이라고 불릴 만큼 천재였지만 아직은 이름 없는 백면서생. 이미 한성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세상에 첫 얼굴을 내민 등장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퇴계는 이미 율곡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훗날 퇴계가 자신의 제자였던 조목(趙穆)에게 보낸 편지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일전에 서울에 사는 선비 이이(李珥)가 성산으로부터 나를 찾아왔었네. 비 때문에 사흘을 머물고 떠났는데, 그 사람이 밝고, 쾌활하며, 기억하고 본 것이 많고, 자못 우리 학문에 뜻이 있으니 ‘후생이 두려울 만하다’는 옛 성현의 말씀이 참으로 나를 속이지 않았네. 일찍이 나는 그가 ‘아름답게 문장을 꾸미는 시문(詞華)’을 너무 좋아한다고 들었기에 이를 억제하고자 일부러 시를 짓게 하지는 않았었네.
떠나는 날 아침 눈이 내렸기에 시험 삼아 음영(吟詠)을 하게 하였더니 즉석에서 몇 수를 읊었다네. 시는 그 사람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볼 만하여 지금 여기에 동봉하니, 읽은 후에 다시 돌려보내주었으면 좋겠네. 학문이 날로 새로워지길 기원하며 이만 줄이네.”
2006-01-05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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