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칼럼] 큰 미국,작은 미국
수정 2005-04-27 00:00
입력 2005-04-27 00:00
이러한 평가는 ‘10월 혁명’을 거친 소련에서도, 또 나치독일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가령 재즈나 스윙음악을 소련에서는 ‘부르주아적 퇴폐문화’로서, 나치독일에서도 ‘흑인과 유대인적인 천박성’으로 공격받고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술과 산업분야에 있어서 미국이 보여준 창발성이나 현대성은 열심히 따라 배워야 할 모범으로 간주되었다.
미국의 대량생산 조직방식인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가 소련에서는 ‘과학적 노동조직’으로 개칭되어 적극적으로 도입되었고, 독일의 자동차 개발연구자 포르셰(Porsche)는 1936년 디트로이트의 포드 자동차공장을 견학하고 독일의 국민차 대량생산 체제를 준비하였다.
이렇게 ‘좌냐 우냐’라는 일반적 통념에 따라 재단될 수 없는 미국에 대한 평가의 핵심에는 미국은 물질적으로는 풍요하지만 정신적으로나 문화적으로는 빈곤하다는 판단기준이 대체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유럽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19세기 중엽부터 본격화된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불리한 정세는 동북아에서도 비슷한 유형의 반응을 낳았다. 동도서기(東道西器)적 발상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즉고매한 동양의 정신을 계속 함양시켜 이를 근본으로 삼으면서 이에 서양(미국)의 산업과 기술을 잘 결합시킨다면 동양은 서양(미국)이 낳은 개인주의와 물질주의를 극복해서 모순 없는 진정한 의미의 근대성을 인류 앞에 제시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의 대표적인 예가 40년대 일본에서 나타났던 ‘근대의 초극(超克)’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와 비슷한 사고유형은 오늘날에도 우리 주위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이는 물질도 정신도 미국의 그것을 그대로 복사해 보겠다는 태도와는 분명히 다르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지금까지 보여준 사회상은 특히 유럽의 정신사 속에서 항상 긍정과 부정, 그리고 애증(愛憎)을 기록해 왔으며 지금도 이는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심장부를 강타한 ‘9·11’은 개인의 자유, 다원주의 그리고 관용을 기초로 한 미국의 민주주의 장래에 비관적인 전망을 낳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 Baudrillard)는 그와 같은 엄청난 사태는 힘을 자제할 줄 모르는 초대강국 미국 스스로가 초래했으며 이는 사람들의 본능 속에 내재하고 있는 상상력의 폭력이지만, 그러나 타인의 불행을 보고 생기는 어떤 고소한 감정까지도 묘하게 자극하고 있다고 솔직히 표현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전에 대서양을 넘나들며 미국과 유럽을 연결했던 미국의 거대한 상선회사가 ‘세계는 작다, 오직 미국만이 크다’라는 광고문구를 사용했던 적이 있는데 이는 오히려 ‘세계화’로 표현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에 보다 더 적합한 내용일 수도 있다. 동서냉전 종말이후의 미국은 이 지상의 어떠한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막강하다. 그러나 전체 인류가 지향하는 보편적 가치에 비추어 볼 때 미국도 여전히 하나의 작은 나라일 수밖에 없다.
미국과 비교할 때 한국은 분명 작은 나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평화의 실현이라는 인류의 보편적인 큰 가치 앞에 미국과 함께 서 있다. 미국은 우리에게 주어진 기성품은 결코 아니다. 우리의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서 항상 다시 발견되고 또 비판적으로 새롭게 구성되어야 할 미완성품일 뿐이다.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2005-04-27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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