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林(289)-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 기사 소리로 듣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공유하기
  • 댓글
    0
수정 2005-02-22 00:00
입력 2005-02-22 00:00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그뿐 아니라 입맛도 간밤의 음식처럼 딱 맞았다. 이를 신기하게 여기며 막 출발하려는 퇴계에게 젊은 주인이 두 손으로 무슨 물건 하나를 바쳐 올리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무엇인가.”

퇴계가 묻자 젊은 주인이 대답하였다.

이미지 확대
“먼 길을 떠나시는데 발이 편하시라고 버선을 가져 왔습니다. 이 버선으로 갈아 신으시지요.”

그것은 족의(足衣)라고 불리는 버선이었다. 집안의 어른이 먼 길로 출타할 때 보통 부인이나 며느리들이 정성스럽게 밤을 새워 무사히 다녀오라고 버선을 만들어 올리는 것이 법도로 되어 있지만 이처럼 객지에서 그것도 생면부지의 하룻밤 길손으로 묵은 퇴계에게 버선을 바쳐 올리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무슨 이런 물건까지 주십니까. 하룻밤 신세진 것만 해도 고마운데.”

극구 퇴계가 사양하자 젊은 주인이 손을 내저으며 말하였다.

“나으리의 존함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나으리께서 누추한 저희 집에서 하룻밤 묵은 것만으로 가문의 영광이나이다.”

버선은 솜을 넣어 누빈 겹버선이었다. 광목으로 만든 백포버선이었으나 퇴계가 버선을 신자 신기하게도 치수를 잰 것처럼 꼭 맞았다.

버선은 특히 발을 넣었을 때 뒤꿈치부터 앞목에 이르는 회목부분이 딱 맞아야 편안한데, 신기하게도 그 버선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꼭 맞았던 것이다.

순간 퇴계는 자신이 떠나보낸 새아기를 떠올렸다.

둘째아들 채(寀)가 죽고 집에 머문 것이 불과 몇 달 되지 않았으나 워낙 음식솜씨와 바느질솜씨가 뛰어나서 퇴계의 수발을 도맡아하던 새아기가 아니었던가. 그제서야 퇴계는 어째서 음식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찬들로만 채워져 있고, 자신의 입에 꼭 맞았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고, 또한 버선이 자로 잰 듯이 정확하게 치수가 맞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던 것이었다.

틀림없이.

버선을 신으며 퇴계는 생각하였다.

이 버선은 며늘아기가 만들어준 것이었다.

한때 자신의 시아버지였던 이퇴계가 하룻밤 길손으로 묵게 되었다는 말을 남편에게서 전해듣고 정성껏 음식을 장만하고 밤을 새워 버선을 만들었을 것이다. 저고리의 깃을 잘라 파의함으로써 엄격한 조선의 율법을 깨고 자유의 몸을 만들어준 고마운 시아버지께 한때의 며느리로서 보은을 한 것이었다.

퇴계는 며느리가 만들어준 새 버선을 신고 한양으로 출발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떠나는 이퇴계의 눈으로 처마 밑에서 몸을 감추고 서서 눈물을 흘리는 며느리의 모습이 보였다던가, 어쨌다던가. 그 여인의 등에는 갓난아이가 업혀서 칭얼댔다던가, 어쨌다던가.

이 에피소드는 한갓 전해오는 야담일지 모른다. 그러나 정혼을 하고 혼례식을 올리지 못하여 출가외인의 생과부가 된 둘째며느리를 파의하여 친정으로 돌려보냄으로써 삼종지의의 엄격한 계율을 깨뜨려버린 이퇴계의 통렬한 행동은 분명한 사실이었을 것이며, 며느리를 ‘길가는 사람 보듯 하지 아니하고’ 한 조상에서 온 똑같은 한 뿌리의 자손으로 본 퇴계의 박애정신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피우던 담배를 끄며 생각하였다.

―이퇴계와 두향의 상사는 틀림이 없는 사실일 것이다.
2005-02-22 22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에디터 추천 인기 기사
많이 본 뉴스
원본 이미지입니다.
손가락을 이용하여 이미지를 확대해 보세요.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