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야기]최명철(45·보석감정사)·김순옥(37·삼성생명 보험설계사)
수정 2005-02-17 00:00
입력 2005-02-17 00:00
소중한 보물로 여겼던 아이들을 생각해 나는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학업으로 오랫동안 외국에 살아서인가, 나는 외국과는 많이 다른 한국적인 정서에 당황했다. 재혼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외국에 비해 한국에서는 자녀가 몇명인지, 심지어 딸, 아들까지 따지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두어번 실패를 겪었다.
재혼하기 힘들 줄 알았다. 하지만 아이들을 보며 다시 희망을 갖기로 했다. 이번에는 그냥 막연하게 ‘좋은 여자’가 아니라 좀 더 구체적으로 상대에 대해 생각해봤다.‘자기 자식을 키워본 사람이 남의 자식도 제 자식처럼 품겠구나.’ 네살배기 딸을 둔 쾌활한 성격의 여성과 만났다. 첫 만남이 있던 5월의 어느 날. 우린 처음 만난 사람이 아니라 낡은 사진첩 속에 있다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 같았다. 그녀의 집이 가까워지자 용기를 내어 말했다.“내일도 만날 수 있을까요?”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생긋 웃더니 “내일은 우리 아이들과 같이 만나봐요.”라고 대답했다.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둘만의 데이트가 아니라 우리의 데이트는 늘 다섯 명이었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과의 마찰도 있었다. 올해 초등학교 4학년이 된 큰아이는 재혼을 반대했고, 예비 새엄마와의 만남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석달에 걸친 데이트는 진짜 가족으로 살기 위한 예행 연습이었다. 비싼 레스토랑보다 서로의 집을 오가며 된장찌개를 끓여먹고, 놀이공원보다는 동네 뒷산에 올라가 함께 줄넘기를 하고 놀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와 그녀는 부둥켜안고 우는 일이 벌어졌다. 큰아이의 생일을 일주일 앞두고 있었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계속 겉돌던 큰아이가 생일 초대장을 그녀에게 내밀었다.“저, 친구들 불러서 생일파티해도 돼요?”라며 아이는 울먹였다. 그동안 친구들이 자신이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까봐 집에 부를 수 없었다고 했다. 그녀도, 나도 안타까움과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우리는 한가족이 되었다.
2005-02-17 3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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