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4)내 마음의 등잔불빛(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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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4-04-26 00:00
입력 2004-04-26 00:00
그리움이 그리워
등잔을 닦습니다
불을 켜면
고요히 무릎 꿇는 시간들
영혼의 하얀 심지를
가만 가만 돋웁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음이 먼저 글썽이던
기다림을 먹고 크는 불꽃의
동그란 집
잊었던 사유의 뜰이 다시
환히 빛납니다.
그 위로 한 우주가
나직히 둘리는 밤
여린 몸짓으로 바람을 타이르며
등잔은 지친 가슴마다
별을 내어 겁니다.
●산부인과 의사의 외도 ‘등잔박물관’
한국등잔박물관에서 펴낸 ‘등잔’이란 도록에 실려 있는 정수자의 시다.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258의 9번지에 있는 ‘한국등잔박물관’을 방문한 것은 지난 15일이었다.며칠 전 약속한 오전 10시에 맞추기 위해 문 밖에서 5분 정도를 기다렸다.등잔박물관 뜰에는 한 노인이 나무와 꽃들에게 물을 뿌리고 있었다.
한 달 넘게 비가 내리지 않는 건조한 날씨여서 새순이 돋는 나무들이나 봄꽃들의 색깔이 갈증을 머금고 있었다.노인은 천천히 물을 뿌리면서 울타리 너머 방문객을 두어 번 바라보았다. 잠시 뒤 할머니 한 분이 앞치마를 두른 채 집 뒤쪽에서 마당으로 걸어왔다.필자가 할머니께 인사를 건네며 관장님을 뵈러 왔다고 알렸다.할머니가 물을 뿌리고 있는 노인 곁으로 다가서서 필자의 방문을 말씀드리는 것 같았다.마침 물 뿌리는 일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할머니께서 문을 열어 주신다.물 뿌리던 그 할아버지가 뵙기로 약속한 한국등잔박물관 김동휘 관장이었다.
10시 조금 지나서부터 등잔에 관한 말씀을 듣고,박물관에 진열된 등잔들에 대한 설명도 곁들여서 두 시간 가량의 인터뷰를 마칠 수 있었다.선생께서는 1940년 세브란스 의과대학을 마친 뒤 1981년 은퇴하신 산부인과 전문의 면허 5번의 의사였다.
문:올해 연세가 얼마나 되셨는지 질문드려도 되겠습니까?
金:우리 내외 나이를 합치면 169년을 살아온 셈입니다.우리는 늘 함께 해왔기 때문에 나이도 합쳐서 먹는 셈이지요.그러는 것이 좋더군요.
문:저도 심심유곡 빈한한 농촌 가정에서 태어나 1950년대 소년기를 거치는 동안 등잔 불빛의 아득한 정취를 먹고 오늘에까지 다다랐습니다.관장님께서 수많은 민속품들 가운데서 유달리 등잔에 애정을 품게 되었고,마침내 우리나라 최초이자 최고의 한국등잔박물관을 세우시기까지의 내력을 듣고 싶습니다.
金:전기라는 괴물이 우리 생활을 점령하게 되었지요.그러자 수천년 동안 우리 선조들이 누려온 온유하고 유구한 삶의 역사가 하루 아침에 돌변하는 변화를 겪었지요.말이 변화이지 사실은 참담한 추방이고,소외이며,회복하기 불가능한 상실이자 파괴였단 말입니다.전기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조급하고 나쁜 버릇이 또 재발한 때문이지요.어제까지 그토록 소중하게 우리 삶을 지켜주던 등잔을 아궁이 속에 던져 넣어버리거나 고물장수에게 주어버린 것입니다.이게 무슨 문화를 지닌 민족의 태도라 할 수 있습니까.실은 그런 이유보다는 내 어머니의 모습과 마음을 내 안에 영원히 모셔두기 위해서 등잔들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등잔불에 어른거리는 어머니 모습
문:등잔불과 어머니는 한국인의 마음 속에 아로새겨진 그리움의 공통분모이기도 합니다만 관장님께서 간직하고 계신 마음의 등잔불빛은 어떻게 빛났을지 궁금합니다.
金:등잔을 모으다 보니 우리 어머니 생각이 점점 간절해지더군요.대여섯 살 적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났지요.그때는 초저녁부터 잠자리에 들었지요.언제나 어머니 곁에서 잠이 들었어요.한참 자다 깨어보면 어머니는 등잔불 곁에서 바느질을 하고 계셨어요.아,어머니가 곁에 계시는구나 싶어지면 한없이 편안해지고 행복감에 휩싸여서 다시 단잠에 빠질 수 있었어요.그러다가 또 깨어보면 어머니는 아직도 바느질을 하고 계셨어요.가만히 어머니를 쳐다보면 등잔불이 가물거립니다.등잔불이 흔들리기도 합니다.희미한 불빛이 어두워서 어머니는 등잔불 바짝 가까이 다가 앉아서 촘촘히 바느질을 하기 때문에 어머니 콧김에 등잔불이 흔들리는 것이지요.그러나 결코 등잔불은 꺼지지 않습니다.어머니는 그냥 옷을 만드는 바느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뭐랄까요,오랜 수도생활을 한 수도승의 참선과도 흡사한 침선(針禪)이라고나 할까.그런 깊은 경지에까지 몰입해 있어서 산 사람의 일반적인 숨쉬기와는 어딘가 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 어린 나는 어머니께 그만 주무시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어머니,이젠 좀 주무세요 하고 싶었지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습니다.등잔불빛에 비친 어머니 얼굴이 너무나 예뻤기 때문에 그 말을 잃어버린 것입니다.등잔불을 마주하고 앉아 계신 어머니 얼굴의 절반은 참으로 은은하고 감동적인 실루엣으로 처리되고 나머지 절반은 등잔불빛을 받아 뭐라 형용할 수 없이 곱고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니까 더욱 예뻤겠지요.지금도 눈을 감으면 어머니가 떠오릅니다.등잔불 하나하나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십니다.내 마음의 등잔불은 꺼지지 않습니다.거기엔 어머니가 계십니다.
●케케묵은 옛것 아닌 새로운 문화의 바탕
문:등잔불이 곧 어머니라는 말씀은 불이(不二)라는 말과 선다일미(禪茶一味)라는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어머니라는 말이 지닌 불멸성,상징성이 등잔불의 역사성과 하나가 되어 전깃불 아래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잔잔하고 지워지지 않는 문화의 새벽빛을 보게 해줄 것 같습니다.
金:등잔에는 조상들의 삶이 들어 있습니다.등잔이 만들어져서 쓰여지고 사람들과 숨쉬어온 생활 가치가 깃들어 있다는 얘기지요.문화에는 그 나라의 총체적인 힘과 역사가 집약되어 나타나는 데 등잔은 전깃불이 들어오기 이전 수천년 동안 우리 민족의 힘과 역사를 길러주고 지켜온 문화의 모체였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불을 켜는 도구라는 의미보다 더 인간적인 상징성이 큽니다.등잔불은 그냥 빛나는 것이 아니예요.가만 바라보고 있으면 사람을 불빛 속으로 데리고 들어갑니다.불빛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립고 아름다운 세계가 보입니다.새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등잔은 결코 케케묵은 옛것이 아니라 느끼고 깨닫는 만큼 새로워지게 하는 문화의 바탕입니다.
문:등잔불빛과 느림의 관계를 말씀하시려고 하는군요.
金:맞습니다.요즘 사람들은 새 것을 너무 좋아해요.신(新),뉴(New),새로움 등을 강조하다보니 전통과 정체성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단 말입니다.새로운 것을 좇는 삶은 자칫 심성이 천박해지고,생활이 낭비와 방탕으로 흘러 세상에 큰 부담을 끼치고 독소가 될 수도 있겠지요.
옛 것의 값어치는 시간의 값어치라기보다 역사를 진지하게 이해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자 만족입니다.빨리 변화하는 삶을 추종하다 보면 자신의 모습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남은 것은 껍데기 뿐일것입니다.
무엇보다 등잔불은 평등합니다.동서남북 사방을 힘 자라는 데까지 평등하게 비추지요.밝다는 것보다는 빛이라는 것,어둠을 밀어내거나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어둠과 공존하려는 평등성 같은 것을 배울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등잔박물관 안내 문의:(031) 334-0797,
인터넷주소 : http://www.deungjan.or.kr
2004-04-26 4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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