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의 살아가는 이야기] 덜 답답한 세상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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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4-01-26 00:00
입력 2004-01-26 00:00
기나긴 명절기간이 지나갔다.어려서는 명절기간이 길수록 좋았다.농촌에서 설과 추석은 농사와 깊은 관계가 있었다.먹을 것이 귀하고 기후가 혹독하던 시절 오곡백과가 무르익고 춥지도 덥지도 않은 추석은 명절 중의 명절,하늘이 내린 축복이었다.설 명절 또한 추수한 곡식이 아직은 충분히 남아있고 소와 돼지는 살찌고 해는 길어질 때다.날로 도타워지는 햇살이 언 땅에 깊이 파고든다는 건 곧 농사꾼들에게 잔인한 계절이 올지니 그 전에 실컷 먹고 충분히 놀아둬야 한다는 신호 같은 거였다.

며느리는 친정나들이를 보내고 시집간 딸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도 설 동안이었다.짧게는 보름 길게는 정월 한달이 때때옷 입고 먹고 마시고 놀고 나들이 다니는 명절기간이었다.냉장고가 없던 시절 음식을 아무리 넉넉하게 장만해 둬도 쉬거나 썩을 걱정이 없다는 것도 하늘이 주는 혜택이요 편리였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군량미가 다급해진 일제는 식민지의 이런 느긋하고 풍요한 세시풍속조차 묵과하지 못했다.농사지은 양식을 거의 다 공출 당해 그렇게 오랫동안 즐길 수도 없었지만 음력 설 자체를 말살하려들었다.양력으로 1월1일이 진짜 새해이기 때문에 음력으로 설을 쇤다는 건 비과학적이라고까지 몰아붙였다.점점 더 강제성을 띠다가 말기로 접어들면서는 도시에서는 떡방앗간의 영업을 못하게 했고 농촌에서는 떡 치는 소리만 들려도 고발의 대상이 됐다.설 명절이 새 해의 뜻보다는 오랫동안 우리의 정서에 뿌리내린 민속으로서의 의미가 더 강하다는 걸 인정하려들지 않았다.그러자 편의상 양력으로 차례를 지내던 집까지 양력 정초는 일본설이라고 배척하고 음력을 조선설이라고 부르면서 마치 독립운동이라도 하듯이 비장한 용기로 음력설을 쇠게 되었다.

우리 고향은 아주 보수적인 산골 마을이고 그런 마을에서도 드물게 할아버지는 상투를 틀고 계실 만큼 고루한 어른이셨는데도 설은 양력으로 쇠도록 하셨다.이유는 간단했다.대처에 나가 학교 다니는 손자들이 방학해서 내려와 있는 동안 차례도 지내고 음식장만도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그때나 이때나 음력설이 겨울 방학 안에 드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우리 집안의 상투 튼 진보 덕분으로 손자들은 귀향의 기쁨과 설에만 맛볼 수 있는 지방색 짙은 음식과 놀이문화에 대한 풍부한 추억을 갖게 되었다.또 하나 그 어른에게 고마운 것은 차례나 제사 지낼 때 여자들도 참예토록 한 것이다.오빠하고 똑같이 차례나 제사 참예를 했다는 건 사실 아무것도 아닌 일일 수도 있었다.그러나 훗날 내가 여자로 사는 데 있어서 주눅 들거나 허세 부리지 않고 당당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광복이 되니까 사람들이 마음 놓고 구정을 쇠게 되었지만 공휴일을 지금처럼 구정에 더 많이 주게 된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그런 변화에 상관없이 나는 어렸을 때 버릇으로 신정이 명절 같다.내 자식들이 어렸을 때는 우리 할아버지와 똑같은 이유로 신정을 지냈고 아이들이 독립하고 나도 늙어가면서 음식장만하고 손님 치르는 일이 힘들어지니까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낫다고,미리 지내고 나서 신정보다 훨씬 심해지는 교통체증,물가고,품귀현상,혹한 따위 구정풍경을 남의 일 보듯이 느긋하게 구경하는 맛도 그럴듯하다.좀 얄미운 심보인지는 몰라도.그밖에도 나처럼 딸만 여럿 있는 집은 설이 두 번이나 된다는 게 여간 고마운 게 아니다.여럿이다 보니 자연히 사돈끼리 지내는 설날이 달라지기 때문에 내 자식이 몸과 신경을 쪼개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나 점점 외아들 외딸이 늘어가는 추세인데 만일 양가가 전통적으로 지내 온 설이 같고 서로 그걸 고집한다면 어쩔 것인가.그럴 때는 남자 쪽 부모가 양보하는 게 좋을 것 같다.뭐니뭐니 해도 아직은 권력을 쥔 쪽이 아들 가진 쪽이니까.하나밖에 없는 자식도 나눠가진 사이가 둘 있는 명절을 하나씩 나눠 갖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겠는가.우리의 사소한 배려가 우리 자식 우리 손자가 살아나갈 앞으로의 세상을 지금보다 덜 답답한 세상으로 만드는 큰 힘이 될 것이다.

(소설가)
2004-01-26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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