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한글·한자·영어 모두가 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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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4-01-08 00:00
입력 2004-01-08 00:00
순수 우리말인 한글만 전용하자는 데에 나는 반대한다.한글만이 우리말이라는 데에도 반대한다.한글우리말 외에도 한자우리말이 있고,당분간은 한글·한자·영어를 병용하는 것이 좋겠고,미구에 영어가 우리말이 되면서 영어우리말이 병용을 넘어 공용하게 될 공산이 크다고 본다.

한글 창제 전에도 수천년에 걸쳐서 수많은 우리 선배들은 중국에서 한자를 빌려다가 의사소통과 사상전개에 나름대로 썼다.그래서 한자는 우리말이다.오랜 시간에 걸쳐서 많은 사람이 사용한 언어가 자신의 언어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자신의 언어가 되는가.예를 들어 미국인은 영어를 이제야 수백년 사용하였는데 영어를 자신들의 언어라고 생각하지 않는 미국인은 없고,그들이 사용하는 언어 영어를 미국인의 언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다른 나라 사람도 없다.

게다가 한자가 우리말이 아니라면 수천년 동안 우리 선조는 자기 글도 없이 살다 간 비문명적인 인간이 되고 만다.긴 세월 한자라는 언어로 생각을 전달하고 사상을 표현한 선배들을 그렇게 평가절하하는 것은 옳지도않으려니와 후손으로서 취할 태도도 마땅히 아니리라.

물론 15세기 세종조에 들어서 또 하나의 우리글 한글이 만들어진 것은 경하할 일이다.그것이 당시 다수 민중이 한자로 의사소통하는 데 불편이 있어서 그들의 생활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서 그랬거나,지배자들이 그들의 통치를 용이하게 하는 수단으로서 필요해 만들었거나,아니면 우리의 고유한 사상표현 능력이 넘쳐 한자로서는 더이상 우리 감정을 다 표현할 수 없어서였거나 아무래도 좋다.또 다른 우리의 언어를 새로 창조하였으니….

그러므로 한글과 한자는 공히 우리글이다.우리에게는 한글우리말과 한자우리말이 있다.따라서 언제부턴가 한자교육을 폐지한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결정이었다.수천년 써온 제 언어를 갑자기 버린 것은 우선 정당성이 없고,작금 중국문자의 세계적 효용성을 고려한다면 어리석기까지 하다.

가끔 산사에 가면 사찰 곳곳에 쓰인 한문을 읽고 해석하고 싶다.그러나 나의 한자 실력으로는 엄두도 못 낸다.해석은 고사하고 겨우 읽는 정도다.그러나 뜻을 헤아리지 못하니 읽기만 해서 무슨 소용이랴.선배들이 써 놓은 글을 바로 새기지 못하니 답답하기만 하다.‘저 글을 줄줄 읽어내리면 얼마나 좋을까.아,이 못난 후배여!’

이제는 서양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더불어 영어가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와 한반도 도처에 퍼지고 있다.한세기 전에 우리에게 선보인 영어는 지금은 세계어로서 막강한 유용성의 위세를 가지고 우리 생활 곳곳에 스며 영향을 끼치고 있다.영어를 지금 우리로서는 거부할 명분도 필요도 없다.그렇다면 환영하고 수용하자.그래서 우리의 제3 언어로 만들자.머잖아 영어는 더이상 외국어가 아니라 또 하나의 우리말 즉 영어우리말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스위스는 여러 역사적 사정으로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세가지 국어를 공용하고 있다.우리도,사연은 달라도,세 가지 언어를 갖고 사용할 수 있다.그것은 다름 아닌 한글우리말과 한자우리말과 그리고 영어우리말이다.한자우리말은 이전처럼 한글과 영어에 병행하여 쓰고,영어우리말은 장차 병행을 넘어 한글우리말과 함께 공용하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주의할 점은,특히 요즘의 영어 열풍과 관련하여,영어만 잘해서는 안 되고 한글도 한자도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 세계역사의 일원으로서 역사발전에 생산적으로 동참하기 위해서는 영어 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유구한 역사의 한글과 한자까지 잘해야 우리의 세계사 참여를 세계인이 환영하고 존중할 것이다.그러므로 정부도 영어 잘하는 사람만 좋아하지 말고 한글우리말과 한자우리말과 영어우리말을 다 잘하는 사람이 새 세상에는 소위 입신출세하도록 언어정책을 잘 짜 나가야 할 것이다.

황필홍 단국대 교수·정치철학 명예논설위원
2004-01-08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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