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선영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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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3-12-19 00:00
입력 2003-12-19 00:00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은 자기 조상을 공경하며 살아왔다.자기존재의 뿌리에 대한 관심과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문화적 전통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기독교와 합리주의 사상을 이어받은 서양에서는 조상은 단지 추모의 대상일 뿐이다.그러나 유교적 전통을 지닌 동양에서는 조상은 신과 동격이 되며,숭배의 대상으로 섬김을 받는다.죽은 조상을 섬기는 의식이 바로 제사다.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제사는 먼 옛날 천재지변이나 질병,맹수의 공격 등을 막기 위한 의식에서 비롯됐다고 한다.그것이 동양에서는 조상숭배 사상과 유교 문화가 결합돼 각 가정마다 제사를 드리게 됐다.예서(禮書)에는 “제왕은 하늘에 제사 지내고,제후는 산천에 제사 지내며,사대부는 조상에 제사 지낸다.”고 돼 있다.온 세상을 다스리는 제왕에게는 천지가 절대자이고,한 지역을 다스리는 제후에게는 산천이 절대자이며,일반인들에게는 조상이 절대자라고 보는 것이다.그만큼 조상은 하늘신이나 땅신에 비견되는 영구불멸의 신격을 지니고 있다.

진실로 자기 존재를 고맙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돌아가신 조상 섬기기를 살아 계신 조상 모시듯’(事死如事生) 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조상 앞에 나설 때는 생사를 불문하고 한 점 흐트러짐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이를 소홀히 하는 것은 결국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며,사람 대접을 제대로 받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같다.그것이 우리의 법도이며,서양도 부러워하는 우리만의 문화적 전통이다.

요즘 정치인들의 조상을 모신 전국 곳곳의 묘소들이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국회 비준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시위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묘소 앞에 술과 음식을 차려놓고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국회 비준 반대 귀신 신위’라는 지방을 써놓거나,‘자손의 매국적 행위를 막아주시고…’ 등의 내용이 담긴 제문을 읽으며 제사를 드린다고 한다.이른바 ‘선영(先塋)시위’다.조상을 모시는 곳이 선영 아닌가.농민들의 다급한 심정은 이해하지만 성스러워야 할 제사를 투쟁의 수단으로 삼는다니 부끄러울 뿐이다.이제 조상 묘를 파헤치는 일도 머지않은 것 같다.

염주영 논설위원
2003-12-19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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