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 - 우리는 이렇게 산다 / “느린것이 좋다”日 ‘슬로 라이프’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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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3-07-30 00:00
입력 2003-07-30 00:00
고도성장기,세계 제2의 경제대국,1인당 국민소득의 미국 추월로 절정에 달했던 자신감이 거품경제 붕괴,장기 불황으로 여지없이 추락해버린 일본 열도에 ‘천천히,천천히’의 물결이 일고 있다.당황하지 않고,서두르지 않고,천천히 살아가는 동경(憧憬)의 생활 스타일을 좇는 일본인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1980년대 패스트 푸드의 상징인 미국의 맥도널드가 로마에 진출하려는 데 대한 반발로 시작된 슬로 푸드(Slow Food)운동.빠르고 편리하고 효율적인 것보다는 조악해도 느긋하고 자연스러움에 포인트를 두는 슬로 라이프는 슬로 푸드의 ‘버전 업’인 셈이다.

|도쿄 황성기특파원|“‘느린’ 쪽이 좋은 것도 있고,‘빠른’ 쪽이 좋은 것도 있다.둘 중 어느 한쪽을 택한다기 보다,예를 들어 바쁘게 일하면서도 휴일은 시골에서 지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일본의 유명 뉴스캐스터인 지쿠시 데쓰야(68)는 ‘슬로 라이프(Slow Life)’의 전도사이다.곳곳에서 강연할 때면 반드시 “‘슬로’는 시간개념이 아니다.바람직한 마음의 상태”라고 강조한다.그의 강연은 언제나 슬로 라이프의 비결을 전수받으려는 일본인들로 성황을 이룬다.

●“천천히 하면 몸과 마음이 건강”

도쿄 시내 한복판에 개인 사무실을 갖고 있는 야노(52)는 출퇴근은 물론 웬만한 시내 볼일의 교통수단은 자전거이다.그는 “전철이나 택시보다는 느리지만 도쿄의 대도시 풍경 속에 느긋하게 생각할 여유를 준다.”는 것이 이점이라고 말한다.딱히 슬로 라이프를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여유있게 사는 즐거움을 자전거를 타면서 느끼게 됐다고 덧붙였다.

아이치(愛知)현의 바닷가에 이웃한 농장인 ‘이토 그린 농원 펜펜’에서 50여명의 젊은이들이 농장주인 이토(50)의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이게 씨앗이고,땅에 떨어져서 파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파,페퍼민트 등 다양한 야채가 재배되고 있는 6000㎡의 밭에는 군데군데 잡초도 섞여 있고,천연비료로 쓰려고 베어낸 풀더미에 갖가지 벌레들도 쉽게 눈에 띈다.“지렁이나 미생물 덕분에 부드럽고 좋은 흙이 생겨났다.”고 참가자들에게 설명하는 이토는 병원에서 인공투석 기사로 일하다 6년 전 “농장에 생을 걸겠다.”고 밭을 사들이고 슬로 라이프의 길로 나섰다.

고치(高知)시는 지난 6월 젊은 직원 12명으로 ‘슬로 라이프 추진위원회’를 설치했다.추진위의 임무는 자연이나 전통문화를 살려 느긋하고 풍부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내 고장 만들기를 위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다.지난 4월 고치 시정의 기본방침으로 채택된 ‘슬로 라이프에 의한 인간회복의 내 고장 만들기’가 채택된 데 따른 것이다.

●잇따라 선보이는 ‘슬로 푸드’

추진위 위원장인 나가노 이사오(33·소방국 소속)는 10월쯤 슬로 라이프 주간을 설정해 시민들에게 첫 선을 보일 예정이라고 밝혔다.추진위는 산중 콘서트,향토요리 강좌 등 슬로 라이프에 어울리는 행사를 중심으로 꾸민다는 계획이다.

자연과 내 고장을 강조하는 슬로 라이프를 경영의 원동력으로 삼자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 16일 도치기현 상공회의소는 ‘슬로 라이프 운동추진사업’ 1차 실행위원위를 열었다.“가치관이 변화하는 가운데 종래의 경영수법으로 기업을 지원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상공회의소는 도치기 이외에는 경험할 수 없는 맛,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침체 일로의 지역경제를 부흥한다는 복안이다.슬로 푸드,슬로 라이프가 일본인의 생활에 파고들 조짐을 보이자 이에 편승한 상품도 잇달아 선보이고 있다.

식품회사인 에비스는 다음달 11일 ‘슬로 라이프 스튜’의 판매에 들어간다.조리 시간이 다른 제품보다 더 걸리고 화학조미료를 넣지 않아 자연의 맛을 즐길 수 있다는 컨셉트를 강조했다.자연을 강조한 스튜 하나로 에비스는 한해 10억엔(한화 100억원)의 매상을 올린다는 계획을 세웠다.

다이와하우스 공업도 슬로 라이프를 실천한 경량철골 구조의 주택을 선보였다.거실의 남북쪽으로 커다란 입구를 내고 천장에도 창을 내 바람이 잘 통하게 했으며 함께 조리하고 먹을 수 있는 개방형 부엌 등이 자랑거리.공사비는 평당 58만엔이다.

슬로 라이프를 테마로 한 책방도 생겨났다.도쿄 아카사카에 지난달 문을 연 한 책방은 ‘화(和),슬로 라이프,아시아,에스닉’이라는 코너를 설치했다.슬로 푸드를 다룬 책이나 느긋한 풍경의아시아 마을을 촬영한 사진집 등 2000여 종류의 서적을 갖추고 슬로 라이프를 추구하는 일본인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

노령화,도시화에 따른 주민 감소로 고민하는 산골 마을도 슬로 라이프를 재정 개선책이나 주민 이주의 유인책으로 삼고 있을 정도이다.

아이치현의 젠만초(千万町)는 초등학교가 취학아동의 감소로 폐교 위기에 놓여 있을 만큼 편의점은 물론 휴대전화도 불통인 ‘불편 그 자체’로 인구 200명의 산골 깡촌.슬로 라이프를 추구하는 도회 사람이 이주하거나 놀러올 수 있도록 300년된 농가를 개조해 농촌생활의 체험 시설로 내놓았다.개조된 농가 뒤편에는 계단식 밭이 펼쳐져 있다.이곳을 찾는 도회 사람들은 이 농가와 밭에서 농작물을 키우는 경험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민들로부터 된장 담그기같은 전통생활을 체험하는 것은 물론 감자 같은 산골 특산물을 맛볼 수 있다.

●자연친화 운동으로 확산 추세

얼마 전 출간된 2003년판 환경백서의 ‘슬로 라이프의 추천’이란 항목.“지구온난화나 쓰레기 같은 지구규모로 전개되고 있는환경 문제 해결의 열쇠는 지역사회에 있다.”소비자가 지역에서 생산된 지역특산물을 소비하는 ‘지산지소(地産地消)’수입식품의 수입량에 수송거리를 계산해 식품의 환경부하를 표시하는 ‘식품 마일리지’의 개념을 소개하면서 백서는 슬로 라이프를 권하고 있다.

기후(岐阜)시는 슬로 라이프 운동을 펼치는 개인,단체에 1개 사업당 50만엔을 지원하겠다고 지난 6월 발표하기도 했다.

지난 18일자 아사히신문의 독자투고란.“여행이 황급하기만 하다.국내여행은 분 단위로 행동하고,해외여행은 버스로 하루 500㎞나 이동한다.아침부터 저녁까지 강행군이다.한곳에 며칠이라도 좋으니 느긋하게 머물며 지내고 싶다.‘아무 것도 없는’ 서비스도 이제는 괜찮지 않은가.”

6월22일 도쿄의 명물인 도쿄타워를 비롯,일본 전국의 빌딩,시설 2000여곳에 오후 8시부터 두시간 동안 일제히 불이 꺼졌다.‘느린 것이 아름답다’는 책의 저자인 쓰지 신이치 메이지대 교수 등 시민단체가 주도한 행사였다.행사에 참가한 시민들은 촛불을 켜들고 어둑한 도시 속에서 슬로 라이프의 뜻을 되새겼다.

marry01@

■시즈오카현 가케가와市선

|도쿄 황성기특파원|일본 중부지역의 시즈오카현 가케가와(掛川)시는 슬로 라이프를 선구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아담한 마을이다.인구 8만 2000명의 소도시 가케가와에 슬로 라이프가 본격도입된 것은 지난해 12월.‘슬로 라이프의 달’로 정하고 시 전역에서 113개의 이벤트를 치렀다.

행사의 하나인 슬로 사이클링에는 남녀노소 60여명이 참가해 30㎞의 거리를 4∼5시간에 걸쳐 천천히 달렸다.‘달렸다’기보다는 달리다,멈췄다,자전거를 끌었다 하면서 경치를 감상하고,다른 참가자들과 얘기도 나누며 느긋하게 이벤트를 즐겼다.지난 5월부터는 ‘느림보 버스’가 시내를 달리기 시작했다.시내 2개 코스 각각 12㎞를 45분에 순환하는 100엔짜리 슬로 라이프 버스는 급한 용건이 있는 사람이라면 답답해 앉아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느려터졌다.

“인생을 80살까지 살 수 있다고 할 때 시간으로 환산하면 70만 800시간.그중에 일하는 시간은 7만시간에 불과하고 나머지 63만시간은 천천히 즐겨야 할 시간이라는 것이 가케가와의 제안”이라고 슬로 라이프를 측면에서 지원하고 있는 가케가와 시청 기획인재과의 니보리 노리코는 설명한다.니보리는 “편리하고 빠른 것을 추구하는 바쁜 21세기는 물질적 풍요는 있지만 정신적 빈곤은 심화되는 시대”라면서 “슬로 라이프를 실천함으로써 마음의 풍요로움을 얻고 나누자는 것이 우리 시의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일본 전국에서 처음으로 슬로 라이프 개념을 시민생활과 행정에 도입할 것을 제안한 시는 시민들로부터 슬로 라이프 아이디어를 모집,이중 40개를 채택했다.시민들이 참가하는 슬로 라이프 행사에는 시 예산 2000만엔도 지원했다.

가케가와 시의 슬로 라이프는 7가지로 구성돼 있다.자동차를 타지 않고 천천히 걷자는 슬로 페이스,기모노,유카타 같은 전통의상을 입자는 슬로 웨어,가급적 천연식품으로 식생활을 하자는 슬로 푸드,오래된 주택에서 진정한 편리함과 멋을 찾자는 슬로 하우스,느긋하게 나이 들어 가자는 슬로 에이징,무농약·유기농을 권하는 슬로 인더스트리,죽을 때까지 배우자는 평생교육 개념의 슬로 에듀케이션.

“7가지를 다 실천할 수는 없겠지만 살아가는 데 이들을 의식하고 실천하려고 할 때 삶이 보다 풍부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게 니보리의 낙관적인 전망이다.
2003-07-30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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