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 생각 다른 사람 껴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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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3-06-20 00:00
입력 2003-06-20 00:00
이를테면 근대 유럽은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비유럽 세계를 타자로 규정했다.그러나 그렇게 규정한 타자성(他者性,otherness)은 비유럽세계를 무시하는 편견과 오만에 가득차 있을 수밖에 없다.역사학대회의 주제는 그런 타자성에서 벗어나 역사 속의 타자였던 약소국가나 식민지,여성,소수 인종,외국인 노동자 등의 시각으로 과거를 재조명해보자는 것이다.
역사학대회의 주제인 ‘타자’는 우리 사회를 떠올리게 한다.우리 사회는 어떤가.노동자·교원 등 각종 단체의 집단이기주의와 지역이기주의,집단민원이 봇물 터지듯 분출하고 있다.한 국회의원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떼를 지어 떼만 쓰는 떼∼한민국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고 걱정했다.
언론 권력의 정부에 대한 공세는 더 무차별적이다.참여정부의 말 실수와 아마추어리즘이 공세를 자초한 측면도 있지만,갓 출범한 정부를 배려하려는 마음은 찾아보기 어렵다.이제 100일을 넘겼을 뿐인데 대통령의 임기말에나 있을 수 있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지난 6일자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기사 조작과 표절로 물의를 빚은 뉴욕타임스(NYT)에 대해 “저널리즘의 기준에 대해 논의를 하고자 한다.”면서 “NYT는 기사와 논평이 뒤섞이고 뉴스에 이데올로기까지 포함돼 있다.”고 비판했다.이제는 보통명사가 되다시피 한 조·중·동에는 NYT 이상으로 기사와 논평이 뒤섞여 있다.예컨대 지난 10일 방송위원회의 한 심의위원은 3개 신문사의 미디어면과 관련해 “자사 홍보지면으로 착각하는 조선일보,정부 비판에 이성을 상실한 동아일보,MBC 비판에 몰두하는 중앙일보”라고 평가했다.그러다 보니 노무현 대통령이 “신문만 안 보면 다 잘되고 있다.”는 말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조·중·동이 자신의 색깔과 이해에 따라 정부 흠집내기에 몰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여 정부의 코드론도 타자의 시각을 무시하는 것이다.노 대통령이 지난 16일 공직사회의 혁신주체를 부처간에 네트워크화하겠다고 한 것도 자기 생각과 같은 사람들만을 쓰겠다는 코드론의 연장선상에 있다.이같은 뉴스의 이데올로기화와 코드론은 타자성의 다른 이름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의 목소리와 요구만을 충족시키려 하면 ‘만인이 만인에 대해 싸우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그러나 자신의 이해에만 집착하면 상대방의 분노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서울대 박지향 교수는 역사학 대회에서 20세기초 영국은 우리나라에 대해 ‘하릴없이 처마 밑이나 길모퉁이에 서 있는’ ‘문명 퇴화의 본보기’ ‘영원히 클 수 없는 어린아이의 나라’라고 규정했다고 전했다.그런데 과연 우리가 그런 오만과 타자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국가는 거대한 공동체다.공동체가 발전해 나가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서로 배려해야 한다.다른 구성원의 시각으로 현상을 보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역사학대회가 타자 읽기를 주제로 정한 것은 다원주의 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특정한 시각과 이념으로만 사회현상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정치권과 언론은 물론,우리 모두가 지식인 세계의 화두가 된 타자 읽기를 통해 자신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황 진 선 문화부 부장 jshwang@
2003-06-2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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