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모진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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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3-06-14 00:00
입력 2003-06-14 00:00
훨씬 뒤에 역사와 세상을 배우면서 예외 없이 지나간 일들에 대해서는 아련한 그리움이,그리고 앞으로 올 것에 대해서는 막연한 기대감이 함께하지만 오늘의 현실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인간의 버릇을 알게 되었다.
인류 역사를 보면 누구도 자기의 당대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기록은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여하튼 당시의 기억은 공포,절망,폭력뿐이다.
당시 한국 상황은 동·서 이념의 갈등으로 설명되고 세상은 이를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그러나 거시적 해석에 따라 보편적 진리로 수용되고 통용되던 내용들도 미시적 경험을 바탕으로 검토하였을 때는 한낱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적절한 예로 지금까지 인류는 프랑스 혁명의 혁혁한 이념인 자유·평등·박애라는 가치가 인류 모두의 보편적인 것으로 믿고 있지만 린 헌트의 ‘프랑스 혁명의 가족 로망스’라는 저서는 박애가 형제애라는 의미이듯이 오직 남성들만의 자유와 평등을 뜻한다고 밝히고 있다.
십년 남짓 유학 생활을 통해 구미 정치 현실을 경험한 바에 의하면 진보와 보수가 절묘하게 교체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분배와 공정성’을 우선시하는 진보 세력과 ‘생산과 효율성’을 내세우는 보수 세력은 상대방을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마치 단체 운동 경기에서 상대를 전체 게임의 파트너로 인정하는 태도와 같다.
처음부터 공정성과 효율성이라는 테두리는 게임의 기본 규칙과 흡사하다.분배를 위해서는 축적된 부가 있어야 하며,축적된 부는 생산을 통해 가능하고,생산과 분배의 과정은 바로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합의가 바탕이 된다.인간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전락하는 사태는 구성원 모두의 명시적 금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명한 내용들이 왜 이 땅에 들어오면 극한으로 치닫고,근본주의적 형태로 고착되는지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나름대로 설명하고 있다.보수 우익의 남과 혁신 좌익의 북 사이의 극한 대립의 역사나,외래 종교 혹은 문화,사상의 수용 과정들은 한결같이 극한 대립의 적절한 예들이다.
서로 다른 인간이 함께 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가진 나와 다른 점을 인정할 때 나도 그와 다른 점을 비로소 그에게서 인정받듯이 관용이라는 지혜의 소산이 바로 타협이다.
타협은 가장 윤리적 개념이다.무원칙의 합의는 야합일 뿐이지 타협은 아니다.이 같은 타협을 비윤리적 개념으로 몰아붙이는 현상이 바로 병든 사회의 대표적 특징이다.
근본주의적 발상이나,떳떳한 주고 받음까지 부정하려는 자세는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아마도 맹자의 어머니가 세 번이나 이사하였다는 고사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현실을 직시하되 긍정적인 요소를 발견하고 밝은 면을 부각시키며 희망의 미래를 일구려는 삶의 자세는 손쉽게 획득되는 자질은 아닌 것 같다.맑고 밝은 어린 시절의 환경에서 체득되는 자질인 것 같다.때 이른 어두움과 절망의 체험으로 일그러진 인간이 갖출 수 있는 자질은 아닌 것 같다.
인간 사회 모든 조직의 존재 이유이며,운영 주체이고,최종 목적은 인간이라는 대원칙이 모든 구성원의 기초 상식이 될 때 바람직한 교육 분위기는 비로소 마련된다.그리고 이런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만이 ‘더불어’,‘꾸준히’ 공동 선의 구현을 위해 노력할 줄 안다.생산과 분배의 우선 순위를 둘러싼 논쟁에 휘말린 경제 현실,보혁구도로 치닫고 있는 정치 현상 이외에도 오직 자기 주장만이 옳다는 교육계,노동 현실,새만금 간척지의 현안 등 타협의 여지를 철저히 배제하고 있는 우리의 각박한 현실이 주의를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김 어 상 서울대 교수 경제학
2003-06-14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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