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 광장] 캠퍼스에서도 때론 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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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3-04-12 00:00
입력 2003-04-12 00:00
‘하늘이 술을 사랑 않으면/하늘에 술별 없었으리라/땅이 술을 사랑 않으면/땅에 술샘 없었으리라/하늘과 땅이 술을 한결같이 사랑하니/애주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으리.’

유난히 술을 좋아하고 예찬했던 중국 당나라 시대 시인 이태백의 시 가운데 한 구절이다.하지만 요즘 대학생 사이에서 이 시를 읊조린다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3,4월 대학가에는 각종 모임 등을 통한 술자리가 많지만 예전 같지는 않다.학생회에서 일하는 한 친구는 신입생 수련회 때 예년과는 달리 ‘협찬’ 받은 술이 많이 남았다며 대학신문사에 수십 병을 선물하기도 했다.

물론 그동안 대학생의 무분별한 음주 행태나 ‘강압적 술문화’가 지탄받아 온 점을 고려하면 ‘반가운 변화’라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이런 모습이 점점 개인화되어 가는 대학 문화의 한 단면으로 보이는 것은 필자의 착각일까.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술은 대화의 수단이다.이웃에 정이 많으면서도 속마음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기는 우리 민족에게 술은 어려운 얘기도 ‘술술’ 꺼내놓게 하는 대화 창구 구실을 해왔다.

이는 음주습관에서도 잘 드러난다.미국인은 각자의 잔 또는 병으로 술을 마시고 서로 권하는 일이 없으며 주량대로 알아서 마신다.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술자리에서 중간에 먼저 일어나도 실례로 여기지 않는다.일본인의 술자리는 1∼2시간 안팎으로 간단하게 끝나고,중국인은 술잔을 돌리거나 바꾸어 마시지 않는다.

반면 한국인은 상대에게 술을 부어 주거나 잔을 건네 술을 권하면서 정을 주고받는 것이 오랜 관습이다.한번 시작한 술자리는 종종 늦게까지 이어진다.시골장터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목로주점은 긴 의자에 여럿이 모여 앉아 술을 즐기며 대화를 나누는 사교장 역할을 했다.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대학생활에 어려움이나 기쁨이 있을 때 술자리의 선후배는 큰 힘이 됐다.술 한잔에 풀리지 않는 인간 관계의 어려움을 토로하던 친구의 눈물,가볍게 시작한 술자리가 치열한 토론장으로 변했던 기억,농촌봉사활동 때 마을 어른에게서 막걸리 몇 잔 얻어 마시며 듣던 힘겨운 농촌생활 얘기,유학간 선배를 생각하며 술자리에서 즉석으로 뽑아 내던 어쭙잖은 시조 한 가락.때로 얼굴을 붉히며 나누었던 얘기들은 “삶에 더 치열하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때문에 술을 마실 줄 알면 인간관계나 경험의 폭이 더 넓어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또 ‘함께 마시자.’라는 집단주의적 술문화의 발로도 실상은 팀워크를 다지기 위한 몸짓이 아니던가.

사람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의 일환이 한국인에게는 술자리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이런 이유로 술은 못 마셔도 ‘술자리의 분위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꽤 있다.

첫째 잔은 사람이 술을 마시게 되고,둘째 잔은 술이 술을 마시게 되며,셋째 잔부터는 술이 사람을 마시게 된다는 말처럼 무엇이든 지나쳐서 좋을 것은 없다.굳이 술이 아니더라도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해 주고 속마음을 풀어 낼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다.

하지만 필자는 오늘도 “술 한잔 사주세요.”라고 팔을 잡아 끄는 ‘03학번’ 새내기를 기다려 본다.

진정한 애주가가 그리는 것은 술 자체가아니라 술과 함께 묻어오는 사람의 향기이기에,개별화된 캠퍼스 생활 속에서 타인의 삶에 좀 더 비집고 들어가기를 기대해 보는 것이다.

장 서 윤 한국외국어대신문사 교육부장
2003-04-12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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