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공안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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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3-03-15 00:00
입력 2003-03-15 00:00
지난 1999년 6월 진형구 대검 공안부장은 고검장 승진에 고무된 탓인지 대낮에 폭탄주를 마시고 ‘조폐공사 파업유도’ 발언을 했다.그의 취중 발언은 특수부와 함께 검찰의 양날개로 꼽혔던 공안부에 치명타를 날렸다.그는 하루아침에 ‘공안 총수’에서 ‘공작 총수’로 전락했고,공안검사들은 국가와 국민의 ‘충복’에서 ‘정권의 하수인’으로 매도됐다.이때부터 민변을 중심으로 ‘공안부 인적 청산 및 개혁론’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서경원씨 밀입북사건’을 재조사하는 과정에서 국민의 정부에서 득세한 ‘신공안’ 검사들은 6공 당시 서씨 사건을 담당했던 ‘구공안’ 검사들을 소환해 조사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공안 검사들이 한결같이 우려했던 정권 교체 이후의 ‘부메랑’이 현실화됐던 것이다.

이에 앞서 1980년대 중반 대학가 운동권 학생들은 ‘원수에 치를 떤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고등검찰관으로 막 승진한 김원치 검사에 대한 ‘앙심’을 표현한 말이었다.80년대 운동권 학생들과온몸으로 맞섰던 김 검사는 이번 ‘기수 파괴 인사’에서 동기가 검찰총장으로 승진하는 것을 지켜보며 대검 형사부장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지난 1994년 12·12 및 5·17사건을 지휘했던 장윤석 서울지검 공안1부장은 정권의 지침에 따라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불기소처분을 내렸다.하지만 그 후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쿠데타 세력들이 처벌되면서 서울고검 등 한직을 전전해야 했다.국민의 정부에서 막차로 검사장에 승진한 뒤 법무부 검찰국장이라는 요직까지 진출했으나 이번에 서울고검 차장으로 밀린 끝에 옷을 벗었다.그에게는 ‘불기소 검사’라는 불명예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공안검사들은 이처럼 ‘체제 수호’보다는 ‘정권 수호’에 앞장선 탓에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부침을 겪기도 했다.그럼에도 검찰내 최고 엘리트라는 자부심과 출세길 보장이라는 당근 때문에 공안부는 항상 검사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하지만 ‘명예혁명’으로 일컬어지는 참여정부 시대를 맞아 검찰 공안부도 존폐의기로에 놓였다고 한다.공안검사들은 시대 탓을 할지 모르지만 ‘업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djwootk@

우득정 논설위원
2003-03-15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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