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 30년 첫시집 내는 소설가 박범신 “문학은 목 매달아도 좋은 나무”
수정 2003-03-05 00:00
입력 2003-03-05 00:00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시집 발간.간헐적으로 시를 발표한 적은 있지만 시집을 내기는 이번이 처음.“떠벌일 일이 아니다.”라며 계면쩍어하는 그를 억지로 불러내 지난달 28일 오전 평창동 북한산 자락에서 만났다.
“거창하게 뭘 벌이려는 게 아니다.작가 제자(명지대 문예창작과)들과 글친구들이 ‘글상’을 차리자기에 ‘쑥스럽다’며 거절하자 ‘술 한잔 사란 뜻’이라고 우겨 ‘조용한 자축’삼아 시작했다.”
문학동네에서 낼 기념시집엔 시인 김승희가 발문 겸 해설로 덕담을 건네고,‘73그룹’(73년 등단 작가모임)멤버였던 시인 정호승과 김명인,소설가 이경자가 각각 책표지 글로 품앗이한다.‘꽃’‘달팽이에게’등 70편의 시를 수록할 예정이다.
박범신은 평생 소설로 밥(?)을 먹어왔지만 정작 문학과 첫만남은 시였다.“데뷔 전 습작시절엔 주로 시를 썼다.”는 그에게 첫 시집은 어찌보면 수구초심의 심정으로 못다한 시인의 꿈을 피우는 것이다.93년 절필선언 후 3년 동안 용인에 칩거할 때 외롭고 심심해 짧은 글을 썼다.문예지에 발표한 것도 있다.
자연스레 화제는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79년 ‘죽음보다 깊은 잠’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후 그는 내리 15년 동안 ‘잘 팔리는’작가였다.그러다 삶과 문학세계에 공허함이 몰려왔다고 한다.‘문학주의’란 원칙을 고수하려면 한번은 겪어야 할 업보였다.“상상력의 우물이 말랐다.”며 미련없이 용인으로 내려갔다.‘한터 산방(山房)’에서 보낸 3년은 생의 전환기였다.10일쯤 나올 산문집 ‘사람으로 아름답게 사는 일’(이룸 발간 예정)은 이 시기 새로 뜬 마음의 눈으로 쓴 글이다.
“경제성장 제일주의의 관성을 버리지 않고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삶에 대한 새 컨셉트를 만들어야 합니다.170평 밭뙈기에 채소 키우고 그림 그리며 삶을 반추하던 시절의 깨달음을 모은 것이지요.”
붓을 꺾을 당시의 마음 속 풍경은 문단복귀 작품 ‘흰 소가 끄는 수레’(96,창작과비평사)로 풀어냈다.3년뒤 그의 눈부신 부활에 당시 문단은 상찬으로 응답했다.“자연 속 고행을 통해 달관의 경지에 이른 것 같다.”(백낙청)“이처럼 생산적인 결과로 나타난 작가의 침묵을 감동없이 읽어낼 수 없다.”(김치수).
그에게 문학은 삶의 전부였다.그의 삶을 인간답게 만든 ‘방부제’였고 물질 만능주의가 가져오는 인간 소외에 맞서는 버팀목이었다.문학과 함께 울고 웃은 30년 동안 그는 행복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한다.이달 말 새로 선뵐 장편소설 ‘내 책상 네 개의 영혼’(문학동네 출판 예정)은 그의 의욕을 오롯이 보여준다.감성이 한창 예민하던 시절인 16∼20살 때 내적으로 겪었던 다양한 인물상을 통해 인간의 보편성을 그려낸다.이어 21살부터 25살까지의 경험도 소설로 만들 계획이다.
어느덧 이야기는 ‘그의 30년’에 이르렀다.
“곡절은 많았지만 문학 곁에서 한결같이 살았다.내가 좋아하는 그 길만을 걸어온 것은 행복이고 행운이다.영원한 ‘청년 작가’의 자세로 계속 걸어갈 것이다.”
제자들이 꾸며준 그의 홈페이지(www.wacho.net)에서 손님을 맞는 문구는,그의 지난 30년과 앞으로의 인생을 상징적으로 웅변한다.
‘문학,목 매달아도 좋은 나무’
이종수기자 vielee@
2003-03-05 28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