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을 찾아] 꽃상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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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2-01-19 00:00
입력 2002-01-19 00:00
이 상여가 마치 혼백(魂魄)과 자분자분 정담을 나누듯 앉아있던 곳,바로 상엿집입니다.
해가 떨어지면 사람들은 상여골쪽으로 아예 걸음을 못했습니다.장에서 돌아오는 사람들도 아예 먼길을 돌아 귀가하곤했지요.상엿집 때문이었습니다.
상엿집은 뒷산 어름에 있었습니다.그곳에 상엿집이 생기고나서 이름도 상여골로 바뀌었지요.나즈막한 초가에 토담을두른 서너평 남짓한 집 속엔 죽은 자를 구천(九泉) 너머 저승으로 태워가는 예쁜 꽃상여가 사자(使者)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었죠.그곳엔 상여뿐 아니라 굴건제복과 만장 등 갖가지 장례용품이 들어 있었습니다.
농투산이로 평생 뼈시리게 땅만 판 사람들,살아서야 어디 가마 타고 위세부릴 일이 있었겠습니까. 해서‘사는 일 원통한 농공상민(農工商民)들’ 죽어서나 저승길 편히 가라고 마을사람들이 추렴해 마련한 공동 장례용품입니다.
이랬으니 살아선 언감생심 꿈도 못꾼 ‘가마 타고 깨춤추는’ 보통사람들의 원(怨)과 한(恨)이 상엿집 곳곳에 지전(紙錢)처럼 널릴 밖에요.
대갓집 혼례 가마야 2인교,4인교가 고작이었지만 ‘상것’들 타는 상여는 상두꾼만 12명에 많으면 20명이 나서기도 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2기통 경운기와 12기통 리무진의 차이라고나할까요.하찮은 신분이었지만 죽어서는 대원군 부럽지 않았지요.공동상여와 상엿집은 이렇듯 지금의 연금보험보다 더 든든한 노후보장이요,복지 아니었겠습니까.다행인 것은 완고했던 조선 양반들도 죽은 넋이 가마 타는 일만은 눈감아 줬다는 점입니다.
상엿집이 세워지고 그 안에 새 꽃상여를 들이던 날,마을이때아닌 잔치로 질펀했던 기억이 납니다.
노인네들은 “인자 낼 죽어도 걱정 ?졀慣만蘿굼繭窄? 흐뭇한 표정들이었습니다.“이눔아,그러면 니가 저 가마 일번으루타볼티여”라며 농을 건네던 그 어른도 지금은 세상에 안계십니다.
상엿집이 ‘왜놈 순사’ 못잖게 두려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오죽했으면 새신랑 달아먹을려고 상엿집 죽장을 꺼내오라고 시켰을까요.이쯤되면 신랑은 파랗게 질려 군말없이 쌈지를 열거나 주안상 올리라는 고함으로 우인들을 달래곤 했지요.이랬으니 코흘리개들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상엿집이 전혀 무섭지 않은 사람이있었습니다.여든을 넘겨 망령이 든 춘배네 할아버지였습니다.
하루는 이 어른이 휘청거리며 상엿집으로 들어가더니 먼지앉은 꽃상여를 이리저리 살피며 매만지는게 아니겠습니까.그땐 무심히 넘겼는데 며칠 후 그 노인네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아,그분이 먼 길 떠날 채비를 하셨구나”라시며 혀를 끌끌 차셨습니다.
기억나시지요.아득한 들길 멀리 너울너울 꽃상여가 떠나고마침내는 ‘어화널 어화너얼 어화리 넘자 어화너얼’ 애잔한 상두꾼들 소리조차 가물가물 아지랭이에 먹힐 즈음이면 뜸부기 우는 들 가운데 서서 까닭없이 눈물을 훔쳤던 콧잔등싸한 추억이.
심재억기자 jeshim@
2002-01-19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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