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한글 천대하는 공직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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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1-10-09 00:00
입력 2001-10-09 00:00
어렵게 공무원 시험을 통과하고 처음 하는 일은 아마 기안(起案)일 것이다.기안문을 작성하다 보면 ‘예산 지변과목’이라는 용어를 만나게 된다.아니 ‘지변(支辨)’이무슨 뜻인가? 주위에 물어봐도 정확한 뜻을 아는 이가 별로 없다.눈치껏 ‘지출’과 비슷한 뜻인가 보다라고 짐작할 수밖에.대다수 공무원들은 이처럼 암호 같은 용어들을배우면서 이제 공무원이 됐음을 실감한다.

몇 년 전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연방 정부 관리들에게모든 공문서를 쉽고 간결한 일상 용어로 쓰라고 지시한 바있다.공문서가 어려운 것은 우리나라에만 해당하는 일은아닐 것이다.그러나 우리나라의 사정은 외국에 비해 좀더심각한 데가 있다.

‘종점부 가각 확장’이나 ‘다수인이 이용하고 있는 통행로,구거 등이 있는 경우’라는 공문서의 문장을 접할 때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국민들이 몇이나 될까? ‘가각(街角)’은 ‘길모퉁이’로,‘구거(溝渠)’는 ‘도랑’으로 쉽게 바꿔 쓸 수 있는데도 관습적으로 ‘가각’과 ‘구거’라는 용어를 사용한다.요즘에는 ‘상징 그림’이나‘소책자’라는 말 대신에 ‘엠블렘’이나 ‘브로셔’라는 영어까지 마구 쓴다.

공문서가 어려운 것은 단어 때문만이 아니다.문장은 더심각하다.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제외하더라도 주어와 서술어가 호응하지 않는 예에서부터 단어들의 연결이 잘못된예,조사와 어미가 잘못 쓰인 예 등이 너무 많다.

‘공연장,집회장,전시장 시설을 설계 또는 감리 실적이있는 업체’라는 문장에서 잘못된 부분은 무엇인가? ‘시설을’이란 목적어에 호응하는 서술어가 없다.‘시설을 설계하거나 감리한 실적이 있는 업체’라고 해야 할 것을 명사를 나열하고 그 사이에 토씨만 붙여 쓰기 좋아하는 공문서의 습성 때문에 잘못이 생긴 것이다.

공문서가 이처럼 어려운 까닭은 무엇보다 공무원들이 우리말을 바르게 쓰려는 의지와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말을 바르고 정확하게 구사하는 능력은 공무원의 기본 소양이다.국민들을 대신해서 그리고 국민들을 위해서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는 공무원들은 더 큰 책임감을 느끼고 우리말을 익히고 가꾸는 데 애를 써야 할 것이다.그리고 정부도 공문서가 바로 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첫째는 공무원을 뽑을 때 획일적으로 영어 점수 위주의시험을 보게 하기보다 그 사람의 우리말 구사 능력을 제대로 측정할 수 있는 탄력적인 시험을 보게 할 필요가 있다.

둘째는 현직에 있는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정기적으로 어문규범 익히기,문장 쓰기 등의 교육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



셋째는 법령문을 위시해 어려운 공문서들을 차츰 쉽고 바른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국민들이얼마나 그 나라 말을 제대로 구사하고 있는가가 바로 그나라의 국력을 재는 척도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임동훈 국립국어연구원
2001-10-09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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