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광장] 통일史에 무엇이라 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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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1-03-17 00:00
입력 2001-03-17 00:00
역사(History)란 단어는 ‘지배자(His Majesty)의 이야기(story)’를 기록했다는 데 뿌리를 둔다.지배계층인 그 분(들)의 이야기,즉 히스 스토리(His story)가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사(正史)에 해당한다.신분계급이 엄격했던 근세전제주의시대까지만 해도 역사는 승리자와 지배자 중심의 기록이었다.

그러나 이제 시대와 사회는 바뀌어 풀뿌리 민초가 주인이고 다수결 원칙에 의해 권력과 정책의 향방이 결정되는 민주정체(政體) 하에서,역사(history)는 대다수 민초의 생각과 판단이 담긴 사회의 주된 사상과 정책과 문화와 행동들에 관한 기록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시나브로 이 지구상에 실질적으로 유일한 분단국이던 한반도에도 6·15 정상회담 이후 화해와 협력,평화와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다.두 정상의 만남에 이은 이산가족들의 극적인 해후는 반세기 넘게 둘로 갈라져 살아온 민초들로 하여금 한결같이 뜨거운 눈물에 적시게 했다.오랜 가뭄 끝의 시냇물처럼 끊겼다 살아났다 반복하면서 아슬아슬 실낱같이 이어져 온 남북간 교류와 협력의 전도에도 큰 봇물이 터질 것이라는 기대감에 모두들 가슴 뿌듯해졌다.

그러나 이같은 역사적 만남도 행복한 예감도, 국내외의 끈질긴 흠집내기·발목잡기·딴지걸기로 인해 크게 상처받고,퇴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인다.그 첫째 이유는 그동안 분단 조국에서 누려온 각종 기득권의 상실위기에 직면한 극우보수세력과,요즘 정치권에서 한창 회자되는 수구적 ‘주류세력’의 반격이 만만찮고 끈질기기 때문이다.

또다른 요인은 뭐니뭐니 해도 부시정권의 정리되지 못한 부실한 대북관(對北觀)과 전략적 미숙이다.한·미 정상회담을전후해 보여준 가장 큰 우방인 미국 지도자들의 머리와 꼬리가, 불분명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란스런 발언들로 인해 국내외 정경유착 세력이 준동해 자칫 해묵은 신사대주의논쟁마저 불러일으킬 조짐이다.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는 식의 감상적 통일론이 있는가 하면,지금 이 체제 이대로면 족하지 무슨 뚱딴지냐 하는식의 ‘현상유지’(status quo)고수파가 있다.반면 통일의이점과 순기능을 예지하며 단계적·점진적교류확대론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세력이 있는가 하면,내심 ‘북진통일론’이나 다름없는 흡수통일을 고대하는 극단적인 통일주의자도있다.

이같이 상이한 통일론의 장단점을 따지는 것은 그 저변에깔린 정치적 저의가 이해와 사연이 얽혀 불투명하기 때문에거의 무의미하다.오히려 문제의 본질은 남북간에 오랜 세월내재해 온,그리고 국내외 상황에 따라 민감하게 확대재생산돼 온 상호불신의 장벽을 어떻게 하면 무리없이 낮출 수 있느냐다.

주지하다시피 남북한에 현존하는 이질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하려면 교류와 협력을 증대하는 방법밖에 없다.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분단 57년의 통일사에서 기념비적 이정표인 93·94년의 ‘남북한 기본합의서와 부속합의서’를 충실히 실천하겠다는 양쪽의 의지와 노력이 기본이 돼야 한다.기본합의서 항목을 한꺼번에 실현하기에 너무 벅찰는지 모른다.현실적으로 서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뒤로 미루고,받아들이기 쉬운 일부터 실천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남북한간의 신뢰구축에는 정부간 협력도 중요하지만 민초들이 주인의식을 갖고 일정한 몫을 수행하는일이 아주 중요하다.괜한 정치적 트집과 국민적 에너지의 낭비를 줄이려면 종국적으로 통일의 주역은 민초와 민간조직들이 맡을 수밖에 없다.정부는 그 길을 열어주고 큰 틀을짜주는 데 주저해서는 아니 된다.현재와 미래의 역사는 바야흐로 민초들에 의해 쓰이고 증언되는 열린사회가 다가와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세상을 이 땅위에 실현하기 위해 민초들은 지금 각자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우리는 지금 통일할 자질을 갖추고 있는가.통일할 준비와 통일을 수용할 자세를 갖추고 있는가.” 우리 사회 정치지도자들 또한 겸허히 자문해보아야 한다.“우리의 통일사에 나는 무엇을 쓸 것이며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김성훈 중앙대교수·前 농림부장관]
2001-03-17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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