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대공분실 위령제
기자
수정 2001-01-12 00:00
입력 2001-01-12 00:00
다음날 경찰은 청년의 죽음 사실을 짤막하게 발표했다.“조사 경찰관이 책상을 ‘탁’하고 쳤더니 ‘억’하고 죽었다.” 서울대생 박종철(朴鍾哲·언어학과3)씨가 죽음으로 세상에 알려지는순간이었다. 물고문으로 숨졌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4개월이 더 지난 다음이었다.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성명에 이은 일부 언론의 끈질긴 추적의 결과였다.
암울했던 군사정권 시절 박씨의 죽음은 엄청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정통성 없는 5공 정권의 뿌리를 흔드는 신호탄이었다.당황한 전두환(全斗煥)정권은 ‘박종철열사 국민추도회’와 ‘고문추방 대행진’을봉쇄하는 데만 10만명에 가까운 전투경찰을 동원해야 했다. 당시 각종 집회의 열기는 지켜보는 이의 숨마저 가쁘게 할 만큼 후끈했다. 6·10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고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6·29선언으로 연결됐다.“종철아,잘 가거래이.아부지는 할 말이 없대이.” 아들의 뼛가루를 뿌리며 흐느끼던 아버지의 모습은 민주화운동의 뒤쪽에 서 있던 이들에게도 가슴 저미는 아픔을 안겼다.
박씨의 위령제가 바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린다.
14주기를 이틀 앞둔 12일 아버지와 어머니·스님 등 3명이 참석해 박씨의 넋을 위로한다고 한다.‘인권수사의 교육장’으로 보존하고 있는 509호실을 유족들이 직접 둘러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고문 20여분 만에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물고문 욕조를 살펴보게되는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세상 돌아가는 데 어둡던’ 말단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아들을 잃은 뒤 민주화운동의 한가운데로 나왔다.지금은 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의장을 맡고 있다.아들을 떠올리며 민주화운동을 하다 의문사한 이들의 가족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민주화의 밀알이 되기 위해 목숨까지 기꺼이 바쳤던 유명·무명 인사들의 노력에 부끄럽지 않게 우리는 이 시대를가꿔 나가고 있는 것일까.
박씨의 14주기를 맞아 한번쯤 되돌아볼 일이다.
최태환 논설위원 yunjae@
2001-01-12 6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