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시론] 나 자신에게 편지를
기자
수정 2000-12-01 00:00
입력 2000-12-01 00:00
단순하게 생각하자.
말을 적게 하자.
보이지 않는 재산을 소중히 여기자.
풀·나무·물에게 감사하자.
느낌표를 많이 쓰자.
집에서 장난을 치자.
이 글은 소설가 정채봉씨가 연초 내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나와서 들려준 얘기다.새천년을 맞아 어떤 마음가짐으로 새로운 해를살아가야 하는지 물었을 때 들려준 대답이다.
수첩에 적어 놓고 틈틈히 꺼내 보면서 많이 생각하고 반성하게 만든글귀들을 한해를 보내면서 다시 한번 꺼내 보았다.정신없이 변해가는 세상에서 무슨 한가한 소리냐고 무시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음미해볼수록 너무도 절실하고 필요한 얘기들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너무 많이 가지고 너무 많이 누리면서 그만큼 많이 불행하다.
보이는 것에만 급급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은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서 1년을 살았다.온통 정신없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생각없이 너무 많이 말을 해서 나도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었다.
특히 쓸데없는 말들이 너무 많은 1년이었다.근거를 알 수 없는 무수한 루머들이 하도 많이떠돌아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아무도 알 수가 없게 되었다.명쾌하게 해결되거나 진실이 밝혀진 것은아무것도 없었다.설(說),설,설 속에 이름이 난무하고 그러면 한쪽은절대 아니라고 잡아떼고 그러다 보면 이쪽도 저쪽도 슬그머니 꼬리를내리고, 사람들은 또 각자 추측만 남겨둔 채 새로운 말을 찾아 몰려간다.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감동이라던가 느낌,여유 같은 건 인제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결국 모두가 상처입고 모두가 불행해져서 연말을 맞게 되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얘기를 들려준 소설가도 병들어 지금 병원에 있다.
은행잎이 온통 발밑에 깔리던 어느날 나는 새로 나온 책 한권을 들고문병을 갔다. 그 책에는 그 소설가가 법정스님에게 보낸 편지가 들어있다. 컴퓨터다,E메일이다 해서 사라져 가는 편지들을 모아 우리는한권의 책을 만들었다.
‘마음에 상처없는 사람은 없지요’ 이 책 제목도 그 소설가의 편지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언젠가 아흔살이신 피천득선생님을 찾아뵙고 이런 속내를 펴 보인적이 있습니다.‘선생님 제 마음은 상처가 아물 날이 없습니다’그러자 평생 그만큼 순수하게 살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여겼던 선생님께서‘정선생 내가 내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가 없어서 그렇지 천사의눈으로 내 마음을 본다면 누더기 마음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별빛처럼 영롱하고 맑은 물처럼 순수한 그 소설가는 결국 세파를 이기지 못해 병상에 눕고 만 것일까….
침대 위에 앉아 미소를 지어 보이는,해탈한 스님 같은 그 분을 보는순간 우리 모두가 죄인인 것같이 송구스러웠다.마음의 상처를 서로어루만져 주고 위로해주는 사랑이 간절하게 그리워진다.우리가 지금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못산 몇십년전에 우리는 지금보다 덜 불행했던것 같다.
무엇을 잃은 채 새 천년 첫해를 보내고 있는가….
좀 구식이고 느리지만 1년이 다 가기전에 각자가 자신에게 편지 한장씩을 써 보면 어떨까 싶다.1년동안 나는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가를.어느때가 가장 아팠고 어떻게 하면 될까를 조용히 정리하고생각해 보면 어떤 해답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남을 탓하기 전에내 탓을 생각해 본다면 사회는,세상은 좀 살만해 지지 않을까 싶다.
모든것이 내 탓인 것을.
■손 숙 연극배우·전 환경부장관
2000-12-01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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