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언내언] 현금자선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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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0-10-12 00:00
입력 2000-10-12 00:00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남에게 빌어서 사는 거지를 가리키는 우리명칭은 다양하다. 동냥아치, 거렁뱅이, 걸인(乞人)에다 각설이, 유걸(流乞)등.

백제 30대 무왕(武王)이 거지로 변장하고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善化)공주를 얻기 위해 서동요(薯童謠)를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는 설화는 당시에도 거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조선 광해군 때 흉년과 6.25전쟁은 거지의 양산을 부채질했다.잘사는 유럽과 미국,못사는남미에도 거지는 모두 존재한다.거지가 동서고금 어디에나 있다는 사실에 비춰 전쟁과 재해 등 사회적 요인 말고도 인간 기질과 습관 때문에 거지가 생긴다는 논리가 그래서 성립한다. ‘거지 조상 안가진 부자 없고 부자조상 안 가진 거지 없다’는 속담은 빈부귀천(貧富貴賤)이 타고난 게 아니라고 지적한다.반면 타고난 거지가 있으며 적어도 ‘거지 기질’이 다분한 사람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먼저 거지가 되는 지름길은 분명하다.우선 벌지 않고 돈만 생기면펑펑 쓴다(낭비벽),집과 가재도구를 팔아 도박으로 날리고 마약을 산다(도박과 마약중독증),술 없이는 하루도 살지 못한다(신경증적 또는정신병적 알코홀릭)등이다. 이런 기질이 다분히 선천적이라는 주장도있다. 사주 팔자를 맞춰보면 닭띠는 본래 ‘심한 낭비벽’이 있다.중독증은 외향적인 성격과 달리 내성적인 사람들에서 많이 발견된다. 이런 논리라면 거지는 타고난 직업이라는 지적도 가능하다.

한마디로 낭비벽,도박·마약중독증이 있으면 돈이 생기는 대로 써버리니 언제나 빈손으로 남는 것이다.따라서 영국 정부가 올 연말까지거지들에게 현금을 주지 말라는 이색적인 캠페인을 벌이기로 한 결정은 일리가 있다.거지들에게 돈을 주지 말아야 그들이 약물과 알코올남용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거지들에게 현금 대신 담요나 옷 등 현물을 주자”고 영국 정부는 촉구할 예정이다.

또 거지들이 쉽게 돈을 버는 데 맛 들이면 일을 하려 들지 않는다는주장은 현대 사회복지이론의 핵심이기도 하다.돈을 주느니 기술을 가르치고 일자리를 주는 게 가난한 사람의 생활을 향상시킨다는 논리이다.



환란 이후 우리나라에서 일시적으로 크게 늘었던 노숙자들 중 상당수가 거지생활을 극복하고 어엿한 생활인으로,일부는 부자로 탈바꿈한 것을 보면 ‘거지 팔자론’도 다소 수정해야 할 듯싶다.다만 앞으로 거지에게 선의로 적선할 때도 생각해봐야 할 것같다.자선의 베품이 궁극적으로 거지의 상태를 악화시킬 것인가,아니면 개선시킬 것인가.여러모로 참 복잡한 세상이다.

이상일 논설위원 bruce@
2000-10-12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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