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물화의 기호학적 의미 따라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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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0-08-29 00:00
입력 2000-08-29 00:00
신라 진흥왕 때 화가 솔거가 황룡사 벽에 ‘노송도’를 그렸더니 새들이 날아와 앉으려다가 부딪쳐 떨어졌다는 일화가 있다.서양에도 그리스의 제우시스라는 화가가 그린 포도송이 그림을 보고 새들이 따먹으려고 달려들었다는 얘기가 있다.모두 사실적인 묘사 중심의 회화가발달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처럼 정물화는 흔히 사실의 정확한재현과 기술로 그 가치가 평가된다. 그러나 정물화가 전혀 다른 시각에서 본격적으로 그려지고 또 전문화된 시기가 있었다.17세기 네덜란드이다.

한길아트의 아르테마 시리즈 제3권 ‘보이지 않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최정은 지음)은 정물화라는 양식이 정립되고 가장 많이 그려졌던 17세기 네덜란드에 초점을 맞춰 정물화의 상징적·기호학적 의미를 살핀다.



본격적인 의미의 정물화는 16세기 후반경에 등장했다.이 때의 정물화는 현재의 삶을 찬양하고 삶의 찰나성을 아쉬워하며 붙잡아두려는인간의 욕망에 다름아니었다.종교가 지배적이었던 중세에 들어서는정물화는 신의 계시나 신의 품성을 상징화하는 데 제한적으로 사용됐다.그러나 종교개혁 후에는 대상을 아름답게 그리기 보다 추하고 이지러진 모습까지 그대로 묘사하려는 경향이 강했다.특히 네덜란드 정물화에서는 꽃이나 과일 등을 그리면서 죽음을 의미하는 해골을 끼워넣거나,꺾여진 꽃이나 빈 술잔 등을 그려넣어 인간의 유한한 삶과 허무를 표현했다.이 책은 지상의 모든 것에 대한 덧없음과 헛됨을 뜻하는 바니타스(Vanitas)라는 개념을 통해 정물화의 속성을 파헤친다.‘바니타스 정물화’는 30년 전쟁 직후인 1650∼1660년 사이에 많이 그려졌다.2차세계대전 때의 유태인 학살과 맞먹는 인명피해를 낸 30년전쟁의 잔혹과 허무를 정물화라는 그릇에 담아낸 것이다.

김종면기자
2000-08-29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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