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읽기] ‘갑골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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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0-01-10 00:00
입력 2000-01-10 00:00
이따금 ‘신화’의 세계 속에 묻혀있던 어떤 시대가 우연한 계기를 통해 ‘사실’의 세계로 이끌려 나오는 경우가 있다.갑골문의 발견이 중국 또는 한자문화권의 고대사를 재구성하게 만든 사건 역시 그러한 경우에 해당한다.100년 전 청나라의 어느 관리가 학질에 걸려 약에 쓰려고 구해 온 거북 뼈조각들에서 처음 발견된 갑골문으로 인해 시아오톤촌을 중심으로 기원전 1384년부터 기원전 1111년경까지 실재했던 은왕조의 역사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마치 토기의 부서진 조각 하나 하나를 붙여서 입체적인 토기를 복원하는 것처럼,거북이뼈와 짐승뼈에 새겨진 글자조각들을 통해 고대사를 재구성하는일은 지난(至難)하면서도 흥미로운 과정이었을 것이다.하나의 가설이 합의에이르는 과정 속에는 신화와 역사, 또는 상상력과 실증정신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놓여 있었을 것이다.그리고 그 줄다리기는 경전 해석을 중심으로이루어져 온 동양학의 전통에 대한 반성을 동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 책을 쓴 김경일 교수는 유교문화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밝힌‘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의 저자이기도 하다.그 책에 비하면 ‘갑골문 이야기’는 신념의 소산이라기보다는 갑골문 학자로서의 실증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

특히 갑골문을 통해 확인해볼 수 있는 ‘동이(東夷)’라는 말의 변화과정을통해 이제까지 통용되어 온 ‘커다란 활을 쏘는 민족’이란 해석에 이의를제기하거나,친구를 나타내는 ‘붕(朋)’자의 청동기문자가 고대의 화폐인 조개를 양손에 들고 있는 모습임을 통해 유교적인 ‘친구’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대목 등이 주의를 끈다.

그의 이러한 견해 역시 가설에 불과한 것이지만,민족주의적인 감정이나 이념적 편향에서 벗어나 문화나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태도는 소중하게여겨진다.

그리고 딱딱하고 지루하기 쉬운 갑골학의 전문지식을 한 알의 당의정처럼만들어서 전달하는 능력 또한 돋보인다.

갑골문에는 왕이 코끼리 나라를 시찰했다든가,무지개가 강물을 마시고 있다든가,저녁에 달이 먹히고 있다는 보고가 실려 있기도 하고,이가 아픈데 낫기위해서는 어느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야 하느냐는 질문도 들어있다.

그 낯선 글자들을 풀어가면서 그것을 딱딱한 뼈조각에 새겼을 사람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문자의 근원에 대해 생각해 보기도 한다.저자의 말처럼 갑골문은 단순한 ‘옛날’의 기록이 아니라 ‘처음’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사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를 사로잡은 것은 갑골 뿐 아니라 토기나 청동기에 새겨진 상형문자들의 풍부한 표정들이었다.이미 획일적인 기호로 전락해버린 문자가 지니지 못한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그 글자들은 우리에게 풍부한 상상력으로 자신의 표정을 해석해 주기를 요구하고 있는 듯 했다.

나희덕 시인
2000-01-1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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