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東亞평화와 인권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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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9-12-08 00:00
입력 1999-12-08 00:00
한반도 전역이 한파에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을 때 따뜻한 남국의 섬 오키나와에서는 평화와 인권의 ‘난장판’이 질펀하게 벌어졌다.참가자의 암구호는 ‘미·일의 냉전정책과 동아시아의 평화·인권’.한국,타이완,일본 등 각지에서 320명 이상이 모여 11월26일부터 29일까지 열기가 이어졌다.

휴양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오키나와는 또 하나의 얼굴을 갖고 있다.바로 미군 기지의 존재이다.섬 전체 면적은 일본 국토의 0.4%에 지나지 않으나,기지를 포함한 미군 전용시설의 75%가 집중돼 있다.미군 기지의 철폐를 둘러싸고 줄기찬 운동이 전개된 것은 물론이다.이번 제3회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국제 학술대회가 오키나와에서 열린 것도 이 때문이었다.

참고로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국제학술회의’는 지난 1997년 2월 제1회타이완 대회를 기점으로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을 위한 국제연대로 돛을 올렸다.

참가자는 물론 발표자까지 자비부담을 원칙으로 하며,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지 않는 것에서 기본적인 문제의식이 조금은 드러나지 않을까 싶다.제2회대회는 작년 8월 제주도에서 열렸다.‘4·3사건’이 국제 무대에 올려진 것은 그 때가 아마 처음일 것이다.

한국 일행 64명(단장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이 오키나와에 도착한 것은 25일.다음날 오전 옛 류큐 왕궁이 있던 슈리성과 박물관을 둘러보고,곧바로대회장소인 사시키로 향했다.27일은 오키나와 전적지를 둘러보는 일정이 준비되어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군 9만4,000여명의 전사자에 비해 민간인이 15만명이나 죽어갔다는 사실이 오키나와 전투의 본질을 얘기해 준다.급기야 일본군은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집단자결을 강요했다.부모가 자식을 죽여야 했던 처절한 비극이 섬 곳곳에서 벌어졌다.

섬에서 아비규환은 섬 남단의 마부니에 있는 ‘평화의 주춧돌’이 겨우 이름만으로 흔적을 남기고 있다.참극은 식민지 조선 백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군의 스파이로 몰려 학살당한 한 조선인 가족명단의 마지막은 ‘제5자(第五子)’였다.젖먹이까지 죽인 것이다.한편 그 옆 한국인 희생자 기념비에는일본군 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던 박정희의 이름이 버젓이 박혀 있었다.착잡하기 이를 데 없는 순간이었다.

오후는 오키나와의 현재의 비극,미군 기지 문제.최근에 외신에 가끔 거론되는 후텐마 기지의 이전 후보지인 헤노코에서 현지 주민들과의 연대 집회가있었다.‘인어’로 오인되기도 하는 세계적인 희귀 동물 듀우공의 서식지를매립하고 동아시아 평화의 ‘수호자’ 미군은 비행장을 건설하려고 한다는것이다.기지로 인해 황폐화되는 것은 듀우공과 자연만이 아니다.그 속에 살아가야 할 인간도 예외일 수 없다.

28,29일 이틀은 본격적인 심포지엄이 4개 세션으로 나눠 열렸다.주제는 ‘동아시아의 냉전을 넘어서’와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구조와 일본’,‘냉전하 동아시아 민중의 수난과 투쟁’이 1,2부로 나뉘어 진행되었고,3국에서 20편의 발표가 이루어졌다.국가폭력과 관련한 여성문제도 대회의 중요한 이슈중의 하나다.여담이지만 그 점에서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는 가장 ‘짭짤한’ 성과를 올렸다.오키나와의 관련 단체와 굳건한 동맹을 맺었으며,모금도 성공적이었으니까.

심포지엄의 총괄이 끝나고 각국의 성명서와 공동성명서가 채택되었다.참가자들의 마음은 푸근하게 이미 하나가 되어 있었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을 향한 발걸음이 착착 그 무게를 더해간다는 것을느낀 것은 물론이다.4회 대회는 내년 5월에 광주에서 열린다.광주민주화항쟁20주년과 한국전쟁 50주년의 의미를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의 실현에 비추어서.

[하종문 한신대교수·일본학]
1999-12-08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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