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광장] 하찮은 볏짚들이 들려주는 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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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9-11-24 00:00
입력 1999-11-24 00:00
지난 봄 비가 내리던 48번 국도 주변의 들판에는 이미 알곡을 세상에 바친까칠한 빛깔의 볏짚들이 평화롭게 누워 있었다.마음이 반가웠다.착근을 하느라 바람에 여린 잎을 떨며 찰랑이는 물바닥에 쓰러질 듯 애처롭던 어린 모들이 저들이다.6월에 벼포기가 굵어지고 향기로운 이삭을 피우던 그들은 햇살을 받고 물을 빨아올리며 쉼없이 알을 키워왔다.우리에게 가장 커다란 보시를 준 생명을 찾아보자면,인간의 노동을 돕고 자신의 고기를 바치던 소(牛)와 들에서 자신들의 업을 치르고 우리에게 양식을 가져다주는 저 벼들일 것이다.그러나 도시인들은 경쟁 속에서 바쁘게 살아가기에 그들의 아름다운 생애와 노고를 생각해볼 겨를이 없다.
색이 검어져가는 볏짚의 빛깔에는 위안이 있다.몸은 위안을 받을 뿐 아니라 즐거운 마음이 샘솟는다.이것은 금세기의 마지막 가을에 얻은 뜻밖의 수확이다.수많은 사람들이 이 지상에서 헌신한다지만 어떤 위인보다 저 볏짚들의 보시가 눈물겹다.거룩하다 할 저들의 생애를 생각하면 인간의 끔찍한 역사와 욕망을 잠시 잊을 수가 있다.잔인한 인간의 역사보다 마치 벼의 거룩한생애를 그리려는 작가처럼.
“나는 엄살꾼이다.볏단들을 보게나.저들은 얼마나 힘들었겠나.홍수와 불볕을 이겨내고 알곡을 사람들에게 바치고 흙으로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무엇인가를 저 벼들에게서 배우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그것들은 모두 말씀이기에 소유할 수가 없다.누가 저 들녘을 가져갈 수가 있겠는가.진정한 배움은 알곡에도 있지만 누워 있는 볏짚들의 모습에도 있다.
자신을 되돌아보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다.그 무엇들이 질서있게 찾아오고말없이 돌아가는 들에서 ‘빈자일등’의 안타까움이 느껴지지만,그들에게 해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그야말로 빈손이다.성인들은 마음이 가난한 자들을도와줄 때 말씀으로 행하였다.진리의 법 이외의 어떤 재화를 나누어 주었다면 그렇게 서로가 사랑하고 아프게 오래 기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농부의 마음이 느껴진다.25세기 전의 일화가 있다.자로가 삼태기를 메고 가는 노인을 만나,“영감께선 공자 선생님을 보셨습니까”하고 묻자,노인이 “손발을 움직여 일하지 않고,오곡의 구별도 할 줄 모르니 누구를 선생님이라고 하겠는가”라고 대답한다.자로가 노인의 아들에게 벼슬하지 않는 것은 의로운 일이 될수 없다고 가르치지만 되레 은둔한 노인이 흥미로워진다.
나는 1999년 11월,농업을 끝낸 서울 교외의 강화에서 중얼인다.
“침묵으로 어머니와 아이들에게 밥을 떠먹여주는 생명이 저 벼들이다.그러니 벼들이야말로 사람들의 어머니다. 저들을 믿지 않으면 무엇을 믿을 것인가” 새 천년에 대한 기대와 의문보다 나는 저 겨울 건너편 봄비 속에서 착근할내년의 어린 모들이 기다려진다.찬 논물에서 힘차게 울어댈 풀빛 개구리들의 겨울잠도 궁금하다.눈얼음 속에서 볏짚들은 자신들의 씨앗을 기다릴 것이다.짐짓 일을 꾸미지 않는 산사의 스님과 한 곳에서 평생을 바치는 상수리나무를 생각하면,참삶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의문은다시 생각해봐도 쉬운 문제가 아니다.무릇 저 짚풀들의 무언의 속삭임을 새겨들을 뿐이다.
“서두르지 말게.제발 천천히 걸어감세.무엇이 그리 바쁜가.바쁘게 걸으면자네도 어렵고 옆 사람도 다칠 것이네.너나없이 일과 사람에 치여 살아가는것 같네그려.좀 느끼며 천천히 사세” 금세기와 송별하는 사람들은 산의 눈구름 같은 감회에 젖어 있을 것이다.우리는 곧 20세기의 과거인이 된다.오늘 누산과 통진을 지나 강화로 가면서,40여일도 채 남지않은 세기의 일몰 속에서 작은 음성을 들은 셈이다.그것은 놀랍게도 별 것이 아닌 일개 볏짚들의 속삭임이었다.깊이 생각할수록 천천히걸어야 한다는 말은 나에게는 적어도 속깊은 당부의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고형렬 시인]
1999-11-24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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