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광장] 기록과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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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9-11-15 00:00
입력 1999-11-15 00:00
지난 9월말께 미국 AP통신사는 추적취재를 통해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26일 미군이 무차별 포격과 사격으로 500명 가량의 양민을 학살한 이른바‘노근리사건’의 사실성을 확인해 국내외에 큰 반향을 불렀다.이 사건은 그간 피해자 가족들이 한국과 미국 정부에 여러차례 진상조사를 확인했으나 사실적 근거가 없다고 하여 묵살돼 왔던 터라 AP의 기사는 진상규명과 피해보상에 적잖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이 보도가 있자 국내의 언론이나 일반의 반응은 여러가지로 나타났다.‘군사작전 지휘권’이 미국에 있다는 부끄러운 사실을 되새기면서 ‘반미구호이유있다’는 독자투고가 있었는가 하면,이미 사건이 벌어진 직후부터 이제까지 꾸준히 진상을 규명하려는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의 통신사가 보도하니까 대서특필하는 국내 언론의 ‘사대주의’를 꼬집는 한 언론인의 자기반성이 있었고,도대체 반세기가 다 되도록 억울하게 숨져간 원혼들을 위로하려는 마음의 자세조차 보여주지 못한 정부를 과연 정부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주위의 탄식도 있었다.

필자가 보도를 접하면서 받은 감상은 역시 미국은 세계를 지배할 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었구나 하는 강렬한 느낌이었다.AP통신사가 입수해 공개한 문서는 한국전 당시 미1기갑사단의 명령서와 25보병사단의 명령서,미8군 본부의명령서 등 4가지다.

1기갑사단은 양민학살 당시 현장에 배치돼 있었고,25보병사단은 1기갑사단의 오른쪽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으며,8군은 한반도에 투입된 모든 부대를 관할하고 있었다.특히 1기갑사단 휘하 8연대의 통신문은 사건이 있기 이틀 전에 7연대 2대대가 발포명령을 받고 있었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중요한 것은놀랍게도 이 모든 문서를 미군이 급격하게 수세에 몰리는 상황에서도 간수해 이제까지 보관해 오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같으면 ‘전통’으로 처리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을 것을 왜 미국은 자신에게도 불리한 이 문건들을 다른 엄청난 규모의 전사자료와 함께문서고에 유지해온 것일까.이는 기록의 작성과 유지가 연속성을 보장하고 책임의 소재를 명확히 하며 근본적으로는 역사의식을 확보해주는 가장 확실한 장치이기 때문이다.그러기에 근대국가만이 아니라 왕조국가에서도 나라다운 나라가 서게 되면 통치자는 기록을 남기고 보관하려고 노력했다.주권자의속성에 따라 기록작성 의도가 다를 수는 있겠지만,그것은 나라를 주체적으로 꾸며보겠다는 의지의 한 강렬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조상들도 그러했다.국왕은 사관이 입석하지 않은 채 신하를 독대할수 없었으며,사관은 국왕의 일거수 일투족만이 아니라 국사와 관련한 모든자료를 사초에 기록해 실록에 전했다.왕실은 ‘규장각’을 만들어 문서고로서 기능하게 했다.조선왕조의 이런 행위가 프랑스혁명 직후 의사록 작성과국립문서고 설치를 결정한 혁명의회의 조치와 일정한 차이가 있음은 사실이지만 문화적 자존과 역사적 주체의식이 양자에 공통된 것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문제는 현재의 우리가 부끄럽게도 조상들이 지녔던 기록문화를 발전시키기는커녕 복원하는 데도 이르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최근 정부문서기록보관소가 생기기는 했지만 아직도 중요한 사항은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 반문화가 건재하고 있다.대통령이나 고위 공직자들이 퇴임하면 재임시에 지녔던 문건들은 마치 자신의 소유물인 양 함부로 가져 나오거나 없애는 일이 아직도 다반사인 듯하며,국회나 지방의회에서만 속기록이 작성될 뿐 정작 중요한 국무회의는 간단한 회의록만을 남기고 있다.

모든 중요한 공적 회의에서는 속기록이 작성돼야 한다.자신의 모든 언행이남김없이 기록돼 진정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된다면 어찌 “기억이 나지않는다”고 둘러댈 것이며,‘역사’ 운운하며 진실을 호도할 수 있겠는가.속기록이 작성되는 회의에서 발언의 무게가 어떨 것인지 우리는 쉽게 상상할수 있다.

우리는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후 아직도 나라를 주체적으로 꾸렸던 역사적경험을 회복하고 있지 못하다.기록문화의 복원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의 주인이 되고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 수 있는 관건인 것이다.

[崔甲壽 서울대교수·서양사]
1999-11-15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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