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제화 고령고시생(上)-’고시병’ 10년 갈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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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9-09-06 00:00
입력 1999-09-06 00:00
40대 초반의 Y씨는 요즘 걱정이 태산같다.10년 넘게 둥지를 틀었던 신림동고시촌을 ‘타의에 의해’ 떠날 때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96년에 개정된 사법시험 시행령은 1차시험 응시 횟수를 네번으로 제한하고 있다.Y씨는 이 시행령이 첫적용되기 시작한 97년부터 잇따라 세번 1차시험에 응시했다.내년에도 1차 시험에서 떨어지면 고시계에서 일단 퇴출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몇개월전 50대 후반의 한 ‘할아버지급 고시생’이 갑자기 사라져 고시촌 사람들 사이에 화제가 됐다.

그가 ‘마침내’ 고시계 은퇴를 결심한 배경은 아무도 모른다.이런저런 소문만 떠돌 뿐이다.신림동의 한 40대 고시생의 죽음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추측도 그 하나였다.그는 지난 3월 우울증 치료제 과다복용으로 숨졌다.

문제는 ‘고시병’에 걸린 노령 고시생들이 적지 않다는데 있다.신림동 일대에 산재한 고시학원 수강생의 약 25% 정도는 30대 후반 이후의 고령 고시생들이다.서울법학원 김용주(金容周) 총무부장의 귀띔이다.

고시병의 실상은 사실 단순하다.“올해만,올해만…”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버티다 보면 어느새 10년을 넘기기 일쑤(한 고시생)라는 것이다.

하지만 고시병은 당사자와 그 가족에게 상당한 고통을 안겨준다.

약물과용으로 인한 부동맥경화증으로 목숨을 잃은 고시생의 경우는 극단적사례일 것이다.이보다 강도는 덜하지만 신림동 고시촌 주변에는 안타까운 사례들이 비일비재하다.

한 고시학원 관계자는 수강신청 때마다 30대 후반의 정신이 오락가락하는미혼여성 고시생이 나타난다고 증언했다.그리곤 학원비를 냈는데 왜 수강증을 주지 않느냐고 따지다가 제 정신이 들면 그냥 돌아간다고 한다.

올해 사시는 2만3,000여명이 응시,사상최고의 경쟁률을 기록했다.하지만 최종 합격의 영광을 누릴 사람은 700명에 불과하다.

이처럼 사시 정원이 늘어났다고는 하나 아직은 바늘구멍이다.고령 고시생들이 양산하기 쉬운 것이다.

물론 근본적인 원인은 출세지상주의 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병폐다.한양대 김상규(金相圭)교수는 “고시가 신분상승과 경제적 여유를 얻는 최선의길이라는 생각이 고연령층의 고시병을 확산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노동시장의 진입 경직성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모든 기업이나 단체들이 신입사원채용시 연령을 제한,나이든 고시생들에게 다른 선택의 길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고령 고시생의 누적은 국가적 차원에서 보면 엄청난 인력낭비다.개인과 가족의 불행이라는 차원을 넘어 사회문제로 비화되고 있는 추세다.

가족의 생계를 돌보지 않고 오랫동안 고시에만 매달리는 것도 이혼사유로성립한다는 최근 판례가 이를 말해준다.고령 고시생들의 명예로운 진로전환에 온 사회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시점이다.

구본영기자 kby7@
1999-09-06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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