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시론] 기록보존과 문화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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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9-08-26 00:00
입력 1999-08-26 00:00
로스는 이 편지에서 서울에 파송한 권서(勸書) 서상륜의 활동보고를 간단하게 썼다.“그가 2년 동안 노력한 결과 현재 70명이 넘는 세례 청원자가 있으며,그가 개종시켜 데리고 온 한 동행자의 말을 빌리면 서울의 서쪽에 있는한 도시에 ‘설교당’을 개설하였고 18명의 신자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기록은 한국 기독교회사의 기년을 바꾸는 결정적인 내용이다.위의 예는 보존된 기록이 어떻게 역사적인 사실을 명증하는 위력을 갖고 있는가를보여 준다.
종래 한국 기독교는 복음선교사 아펜젤러(감리회)와 언더우드(장로회)가 한국에 도착한 1885년 4월 5일 이후에 시작되는 것으로 인식해 왔다.그러나 로스의 이 편지는 이들 복음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착하기 적어도 한달 전에 서울에는 이미 70여명의 세례 청원자가 있었고,서울 서쪽의 한 도시에서도 18명의 신자들이 모여 ‘설교당’을 개설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이 기록은 한국 기독교의 시작 시기를 앞당겨 주었을 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가 외국 선교사가 아닌,열성있는 한국인 권서들에 의해 시작되었음도 웅변적으로 보여주었다.단 몇 줄의 기록이 이렇게 역사를 바꿔버렸다.
97년말 IMF 경제위기를 맞을 때,이 나라의 경제를 좌우하고 있던 고급관료두 사람이 보여준 책임전가의 비열한 행태를 우리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IMF행을 앞둔 시점에 바뀐 전·현직 재정경제원 장관들은 ‘IMF행 결정시기’의 인계인수 여부를 두고 흙탕물 공방을 벌였고 그 싸움에 전직 대통령까지말려든 적이 있다.이 점은 국회 청문회에서도 분명하게 가려지지 않고 얼버무려지고 말았다.다만 인계했다고 주장한 측은 경제파탄의 책임 여부로 법의심판을 기다리고 있고,인수받지 않았다는 측은 다음 정권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관운을 누리는 듯하다가 다른 일로 역시법의 심판 아래 있다.
왜 이처럼 불필요한 공방이 가능하였으며 그것을 바라보는 국민들을 피곤하고 답답하게 만들었을까.그런 중요한 시점의 인계인수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인계인수서에 그 내용을 남겼다면 머리 좋기로 이름난두 사람인들 어찌 감히 거짓말로 책임전가를 할 수 있었겠는가.
중요한 일일수록 기록으로 남겨져야 한다.그러나 탈법적인 사건일수록 문서로 남겨지기를 원치 않는다.군사정권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증거를 남기기싫은 일들은 직접 말 혹은 전화로 지시하는 버릇이 있었다.그런 분위기에서문서를 요구하는 깐깐한 합리주의자들의 목이 성할 리 없었다.설령 어쩔 수없이 문서로 남겨졌다 하더라도,그 문서는 검증을 필요로 하는 시기까지 보존되지 않았다.
12·12사태때 계엄사령관을 체포하기 위해 전두환이 요구했다는 대통령의재가서는 지금 온데간데 없고,신군부가 자신들의 권력장악을 합리화시키기위해 급조했던 국보위의 기록도 지금 어느 수중에 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당시의 진실을 밝히자면 꼭 필요한이런 문서들은 왜 보이지 않는가.그 기록으로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날까 두려워하는 무리들이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그뿐인가.벌써 몇대째 대통령을 거쳤건만 그들이 재임시에 청와대에서 남긴기록들이 공적으로 보존되어 있지 않다.이것이 21세기 근대국가를 지향하는우리 기록문화의 현실이다.
외국의 여러 기록보존소를 열람하면서 그들의 치밀성과 정직성을 보고 많은것을 느꼈다. 기록보존은 그 사회의 문화적 척도이면서 통치능력의 증거이다.영국이 해외의 식민지를 많이 가졌던 것은 지금에 와서 자랑스러운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그 시대에 이미 알차게 정리된 식민지 관련 문서가 영국의 식민통치 능력을 보인다고 한다면,그것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라거나 제국주의적인 시각이라고만 할 수 없다.
조선조가 그런 유약한 힘을 가지고서도 500년 넘게 왕조를 유지한 것은 기적같이 보이지만,지금도 남아있는 방대한 기록문화는 그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설명해 주고 있다.기록을 정직하게 남기지 않는 시대는 문화를 논할 자격이 없다.그런 점에서 내년부터 발효될 공공기록보존에 관한 법률의 시행에지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李萬烈 숙명여대 교수·한국사]
1999-08-26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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