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충같은 존재” 신창원 일기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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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9-07-20 00:00
입력 1999-07-20 00:00
신창원의 일기장은 ▲법 집행과 행형에 관한 불만 ▲도피생활과 경찰을 따돌린 행적 ▲자신의 삶에 대한 소개 등 크게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일기장에는 98년 1월 전북 익산 역전파출소 앞에서 경찰을 뿌리치고 달아난 일등이 적혀 있다.신의 일기장 주요 내용을 간추린다.

■익산역 탈주 98년 1월8일 익산역 근처에 있는 호프집에서 영숙이와 함께식사를 하고 있는데 6∼7명의 사내들이 들어왔다.그들은 내게로 와서 “신창원이 여기 있다는 신고가 들어와서 그런다”며 신분증을 요구했다.나는 “주민등록증을 갖고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형사들은 내게 윗옷을 벗어보라고했다.나는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파출소나 경찰서에 함께 가서 신원을확인해 보라”고 말했다.

나는 경찰 승합차를 타고 역전파출소로 갔다.차가 파출소 앞에서 멈춘 뒤형사가 내 바지를 잡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팔을 뿌리치고 한 형사를 빠르게 밀치자 틈이 생겼다.그 순간에 나는 그 틈으로 뛰었다.

막 뛰는데 “쏴라”는 소리가 들리고 여러 군데서 총성이 들렸다.총을 피하기 위해 지그재그로 뛰는데 앞에 창고 같은 건물이 있었고 우측으로 꺾어지는 모퉁이가 있었다.그곳을 돌아 다음 담까지는 20∼30m.그 담 위로 몸을 던지는 순간 자동소총을 쏘는 듯한 총성이 연속으로 들렸다.담을 넘어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철길 쪽으로 가는데 창고를 돌아서 포위하려고 온 듯한 형사 2명이 사격을 해 반대쪽으로 방향을 돌려 빌라쪽으로 가서 담 위로 몸을 날리는 순간에 7∼8발의 총성이 더 들렸다.나는 담을 넘어 빌라단지 안에 상의를 벗어 놓고 T셔츠 차림으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경찰이 나를 향해 쏜 총알은 최하 30발 이상이었다.0.5초만 늦었어도 내 몸에는 여러 개의 구멍이 뚫렸을 것이다.아마 사살령이 내려진 것 같다.뛰는순간 곧바로 집중사격을 하는 것을 보면 나는 나쁜 놈에다 사회에 해충 같은존재인 것은 분명하다.범죄를 해야 먹고 살 수 있으니….

■천안 도피생활 (97년 10월18일 천안시 목천면 삼성리 한영빌라에서 평택경찰서 원종렬(元鍾烈) 경장을 따돌리고 달아난 뒤 천안에 있는 애인 전모씨에 다시 나타났을 때) 그들(원경장 등을 지칭하는듯)이 해분이(애인 全씨의 이름인 것 같다) 혼자 있는 집에서 안방을 차지하고 해분이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는가.그들은 나를 더 이상 수사하지 않고 수사를 종결하겠다는 거짓말을 하고 해분이를 건드렸다.이것은 해분이가 울면서 내 뺨을 때리면서 한말이다.그 자리에 성경이(97년 11월1일 평택에서 동거를 시작했던 姜모양을가리키는 것 같다)도 함께 있었다.해분이에게 7∼8대 뺨을 맞으면서도 그냥있었다.내게도 잘못이 크기 때문이다.

■익산 은거 1 (98년 1월11일 천안시 광덕면 산천식당 앞에서 경찰 2명과 격투 끝에 권총을 빼앗아 도주한 뒤 3월6일 김제시 금구면 대화리 신선휴게소앞에서 낚시배낭을 벗어던지고 도망갈 때까지 사이인 것 같다) 익산에 있을때 정말 견디기 힘든 시간이 있었다.추운 겨울 손목 3군데가 부러지고 머리6∼7군데가 깨진 상태에서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벌거벗은 채 이틀을 견뎠고 울면서 뼈를 맞췄다.비스킷 하나로 하루를 살며 두 달을 버텼고 썩은 고기를 먹고 며칠을 복통으로 신음했다.

■익산은거 2 (98년 3월6일 신선휴게소 앞에서 달아난 뒤 7월16일 서울 강남구 포이동에서 경찰과 격투를 벌인 때 사이인 것 같다)비오는 날 잠을 잘곳이 없어 비를 맞고 자다가 심한 몸살도 앓아 봤고 한여름에는 모기에 물리면서도 잠을 자야 했다.아침에 일어나면 온 몸이 마치 두드러기가 난 것 같이 부어올랐고 몸에 피가 날 때까지 긁고 또 긁으면서 두 달을 넘게 살았다.

이런 것은 견딜 수 있다.이보다 몇 배 더 힘든 것도 견딜 수 있다.

매일 술을 마셨고 낮에는 논에 가서 쓰러진 벼를 베었다.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미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마치 미친 놈처럼 쉬지 않고 일을 하니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처럼 보았다.내가 벼를 벤 것은 농부들이 불쌍했기때문이 아니라 내 몸을 학대하면서 일을 하는 동안에는 분한 마음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1999-07-2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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